정약용의 유배 18년과 서유구의 야인 18년…조선경제학의 대가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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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유배 18년과 서유구의 야인 18년…조선경제학의 대가 탄생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2.16 0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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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②
▲ 동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왼쪽)과 풍석 서유구는 각각 18년의 유배생활과 은둔생활을 통해 조선경제학의 대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다산과 달리 서유구가 성취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농업·생활 경제학 완성한 경제학자…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②

[한정주=역사평론가] 경화거족의 자손답게 서유구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때 그는 정조의 어명을 좇아 농업에 관한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수리(水利)시설과 농기구의 개량, 농서의 편찬 보급, 한전론(限田論)으로의 토지제도 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선 시대의 학자인 이익이나 박지원 등이 내놓은 농업 개혁론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 시대의 경제학자들과 어깨를 겨루고도 남을 만한 대학자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아직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조선경제학의 대가’로 거듭나는 계기는 정치적 불행과 뒤이은 집안의 몰락으로부터 찾아왔다.

서유구 집안의 정치적 후원자나 다름없었던 정조가 급서(急逝)한 지 6년째 되는 1806년(44세) 당시 달성서씨 가문을 이끈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된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1787년에, 아버지 서호수는 1799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의 ‘옛 영광’을 다시 찾을 희망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옛 영광은커녕 자칫 세도 권력에 의해 정치적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유구는 스스로 홍문관 부제학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1824년 조정에 복귀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서유구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경화거족의 신분에서 직접 논밭을 갈고 나무를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치적 불행과 가문의 몰락 앞에서 서유구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우리나라 사람 치고-초등학생 수준의 역사 지식만 갖추고 있다면-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1801~1818년) 동안 이룩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1806~1824년)와 동일한 기간(18년) 서유구가 성취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욱이 정약용이 남긴 저술은 거의 대부분 국역(國譯)되어 일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반면 서유구의 저술은 국역된 것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여하튼 지금부터 서유구가 18년 은둔생활 동안 이룩한 실학(경제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찾아 올라가 보자.

서유구는 18년 동안 여섯 차례나 거처를 옮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들 서우보의 유일한 도움을 받아 무려 113권 52책 250만자에 달하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그가 이토록 방대한 서적을 저술하는 작업에 매달렸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할아버지 서명응 때부터 3대째 내려오는 가학인 ‘조선의 농업 경제학’과 더불어 “향촌과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농사와 의식주 등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해 완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거처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때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하고, 물러나 거처할 때는 스스로 의식주에 힘쓰고 뜻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와 교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서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향촌으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자신의 뜻과 생업을 돌볼 수 있는 서적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산림경제󰡕 한 책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도 수집한 정보나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에 나는 향촌과 시골 마을에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서책을 저술하기로 했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예언(例言)’ 중에서

서유구는 여기에서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서책을 저술했다고 했는데, 그럼 실제 그가 모아 참고하고 인용한 서적은 얼마나 됐을까? 그가 󰡔임원경제지󰡕에 인용하고 있는 서적은 약 900종(자신의 저술 7종을 포함해 정확하게 893종)이지만 실제 이 책을 저술·편찬하기 위해 참고한 서적은 수천 종에 달했다.

그렇다면 가문의 몰락에도 서유구는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서적을 소장하고 저술 및 편찬 활동에 활용할 수 있었을까?

경화거족들은 경제력과 더불어 높은 학식과 문화 수준을 갖춘 덕에 서화나 골동품 수집은 물론 각종 서적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특히 서유구의 집안은 할아버지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 때부터 장서가로서 그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사신행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서적들을 구입해 돌아왔다. 서명응은 1755년과 1769년 두 차례 청나라를 다녀왔는데, 두 번째 청나라 여행길에서는 천문학과 역법 등 중국 및 서양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적을 포함해 500여권에 달하는 서적을 가져왔다.

당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황윤석이 서명응의 집에서 책을 빌려갈 정도로 이 집안은 최신 정보와 지식을 담은 귀중한 서적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서호수 역시 1776년(정조 즉위년)과 1790년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특별히 학자 군주였던 정조의 특명까지 받아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임금의 명령을 수행함과 동시에 자신과 집안사람들에게 필요한 수많은 책들을 함께 가져왔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 속에서 성장한 탓에 서유구 역시 어렸을 때부터 즐겨 서적을 모은 장서가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듯 수집된 수천 권의 장서들이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저술·편찬할 때 ‘학문의 저수지’ 역할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1806년 홍문관 부제학을 사퇴하기 전까지 서유구의 관료생활은 대부분 서적의 편찬과 교열 등 학술과 관련되어 있었고, 또한 그는 규장각에서 생활하는 동안 풍부한 서적과 자료들을 마음껏 열람하면서 지식의 폭을 엄청나게 넓힐 수 있었다.

이때 서유구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일본, 더 나아가 서양의 각종 지식과 학문까지 종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과 높은 학문적 식견을 길러준 관료생활 덕분에 가문의 몰락과 온갖 간난 속에서도 조선 최고의 ‘농업 및 일상생활의 경제학’ 서적인 󰡔임원경제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앞서 지적했듯이 가학과 향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해 완성하겠다는 서유구의 확고한 신념이 ‘근본 에너지’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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