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사라”…조선인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 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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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사라”…조선인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 최남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2.14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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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⑦ 서비스·마케팅서 이득 창출 생각한 최초의 조선인 부자
▲ 최남(원안)과 동아백화점의 1931년 전경(오른쪽 건물). 왼쪽의 큰 건물은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이다.

[조선 거상에게 배운다]⑦ 서비스·마케팅서 이득 창출 생각한 최초의 조선인 부자

[한정주=역사평론가] 최남은 서비스와 마케팅 역시 상품처럼 이득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조선 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독특한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으로 소비자들을 매혹시키는 방식으로 새롭게 시장을 개척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고객을 제일로 삼는 서비스와 마케팅을 경영의 최우선 전략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영 방식 덕분에 그는 일제강점기 종로 거리에 조선 사람 최초로 백화점(동아백화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처음 최남은 사람들이 내다 버린 고물 양복이나 셔츠, 헌 구두 등을 새로 수선해 되파는 일로 돈을 모았다. 그러나 이 일은 사업이라기보다는 생계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것은 고물을 수선해 모은 종자돈과 3000원의 빚을 내어 마련한 돈으로 종로 인사동 부근에 덕원상점이라는 잡화점을 차린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업에 뛰어든 초기 덕원상점은 종로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상점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남은 다른 상인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자신만의 독특한 서비스와 마케팅으로 덕원상점을 종로에서 제일가는 명소로 만들었다.

◇ “고객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라”

당시 종로 부근의 잡화점 상인은 대부분 길을 가다 들르거나 혹은 알아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다렸다가 물건을 파는 방식으로 장사를 했다. 그러나 최남은 자신의 가게에 ‘한 번 찾아온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아오도록’ 만드는 서비스와 마케팅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한 번이라도 가게에서 물건을 사간 사람은 꼭 기억해 두었다가 두 번째 찾아왔을 때 앞서 사간 물건을 잘 사용하고 있느냐 혹은 그때 함께 온 자녀는 학교에 잘 다니느냐는 식의 인사말을 건넸다.

최남은 예나 지금이나 소비자라면 누구나 ‘왕 대접’을 받고 싶어한다는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더욱이 손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최남은 상품에 대한 품평은 물론 소비자 트렌드에 관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품평과 정보를 밑천 삼아 그때그때 손님들의 취향과 기호에 맞는 물품들을 상점에 들여놓았다.

최남은 마케팅 기법에 있어서도 다른 상점들과 차별화된 전략을 추구했다. 그는 계절과 유행의 변화에 맞추어 시시각각 상품의 진열을 바꾸어 언제나 새로운 가게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상품 진열 및 판매 방식은 소비자들에게 같은 가격에 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다른 상점에 비해 훨씬 더 고급스럽고 값비싼 물건을 샀다는 심리적 만족감을 제공해주었다.

또한 최남은 물건값을 정해놓고 파는 정가제를 종로 일대에서 처음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물건을 살 때 ‘에누리’는 당연한 상식이었다. 물건 값을 깎지 않고 산다는 것은 곧 바가지를 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최남은 자신의 가게에 있는 모든 물품에 정가를 붙여 판매했다.

그런데 그가 도입한 ‘정가제’는 속이지 않고 판매한다는 확신을 소비자에게 주지 못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그는 어렵지만 시간을 두고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정직하게 판다는 신용을 끊임없이 소비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그 덕택에 덕원상점의 ‘정가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로 인해 최남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 “최고의 서비스가 최고의 고객을 부른다”

덕원상점의 성공에 힘을 얻어 최남은 불과 8년 만에 종로 대로에 5개의 점포를 소유하고 자본금 20여만원에 점원 40명을 둔 큰 상인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최남의 목표는 대상점의 주인이 아닌 ‘조선인 최초의 백화점 주인’에 있었다.

최남은 당시 거대한 자본을 앞세워 경성의 상권을 장악해 가고 있던 일본인의 백화점 사업을 마냥 팔짱만 끼고 지켜볼 수 없었다. 결국 1932년 1월4일 최남은 지금의 종로2가 부근에 4층짜리 동아백화점을 개설한다. 이때도 그는 사업 초기부터 지켜온 자신의 고객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을 백화점 경영의 원칙으로 내걸었다.

당시 동아백화점이 내세운 경영 방침은 크게 세 가지였다. 상품 진열장의 배치를 색다르게 하는 것, 200여명의 점원 가운데 여점원의 비율을 50%로 하는 것, 점원은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손님을 맞이할 것 등이 그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동아백화점보다 앞서 1931년 종로2가에 설립된 박흥식의 화신상회(화신백화점의 전신)를 조선 사람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박흥식의 화신상회는 엄밀하게 따져볼 때 백화점이 아닌 ‘대형 잡화점’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작가 박상하씨는 백화점을 둘러싼 최남과 박흥식의 라이벌 관계를 다룬 ‘<한국기업성장史>⑦ 종로 거리의 두 거상, 백화점 공방은 시작되고···’(아시아경제 2012년 2월29일자)라는 글에서 최남의 동아백화점이 세워진 이후에도 한동안 화신상회의 박흥식은 조선총독부에 제출해 놓은 백화점 허가가 나오질 않아 연일 울상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박흥식보다 앞서 조선 최초로 백화점을 세운 이는 동아백화점의 최남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손님을 맞이해 상품을 판매하는 여점원의 비율을 50%로 한 동아백화점의 마케팅 기법은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다. 세련된 옷차림과 용모의 여성 판매 직원은 남성들은 물론 여성들에게까지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좋은 이미지의 판매원이 파는 물건에 대해서는 손님들이 좋은 이미지를 갖는다”는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한 최남의 또 다른 아이디어이자 상술이었다.

이렇게 독특한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최남은 마침내 동아백화점, 국일관, 동순덕, 경성하주조합 등 수많은 기업을 경영하며 종로와 동대문 일대를 주름잡은 조선 재계(財界)의 거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국적과 출신 따지지 말고 인재를 등용하라”

남다른 서비스 정신과 시대를 앞선 마케팅 전략 이외에 최남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필요한 인재라면 국적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발탁해 경쟁자인 일본 백화점의 장점까지 적극 수용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최남이 종로에 조선 사람의 손으로 처음 백화점을 연 1932년 1월 이전 서울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쓰코스, 미나카이, 히라타 백화점 등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일본인 백화점은 거대한 자본력과 선진적인 마케팅 기법으로 서울의 모든 시장과 상가를 압도하며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종로에서 덕원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최남은 만약 종로에 조선인 백화점을 세운다면 이들 일본인 백화점과 경쟁하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최남은 종래의 시장이나 상가에서 장사한 경험과 노하우 이외에 백화점 운영에 관한 어떤 지식과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어떻게 했을까?

먼저 최남은 당시 서울에 있던 일본인 백화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미쓰코시 백화점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상점들을 조사하고 손님들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정작 가장 중요한 백화점 운영 시스템과 특유의 서비스 그리고 유통기법을 배울 길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전전긍긍하며 세월을 보낸 최남은 그동안 공을 들여 사귀어 놓은 일본인 점원 와타나베를 스카우트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와타나베의 경험과 노하우를 빌려야만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백화점을 갖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7년이나 근무한 경력을 지닌 베테랑 점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미쓰코비 백화점이라는 좋은 이미지와 함께 수많은 단골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다. 와타나베만 스카우트할 수 있다면 백화점 설립에 필요한 노하우는 물론 초기 고객 유치에도 아주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최남은 삼고초려(三顧草廬)하는 마음으로 와타나베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다. 결국 그는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받는 월급보다 30%를 더 인상해주는 한편 먼저 덕원상회의 지배인으로 고용한다는 조건을 앞세워 와타나베를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한다.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덕원상회로 자리를 옮긴 와타나베는 남다른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으로 덕원상회를 일약 ‘종로 최고의 가게’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미쓰코시 백화점 시절 쌓아놓은 고급 손님들까지 덕원상회를 찾았다.

최남이 와타나베를 발탁한 효과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와타나베는 일본인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직접 일본 공장에서 최남이 운영하는 덕원상회로 물품을 납품하는 독자적인 유통망을 개척했다.

이로써 최남은 국내의 일본인 상인을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일본 공장→덕원상회 혹은 동아백화점→소비자로 통하는 유통로를 뚫어 좋은 상품을 싸게 파는 자신만의 상술로 승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와타나베를 기용해 백화점 설립에 필요한 기반을 갖춘 최남은 마침내 조선인 최초의 백화점인 동아백화점을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의 거대한 자본 규모와 유통망 때문에 백화점 사업에 뛰어드는 일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백화점을 설립할 엄청난 자본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상품 조달과 가격 경쟁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과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남은 이러한 어려움과 난관을 일본인 출신인 와타나베를 기용해 해결하는 전략으로 돌파했다. 능력이 있고 자신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있다면 조선인이면 어떻고 일본인이면 어떤가 하는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가 ‘조선인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라는 명예를 최남에게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사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秦)나라를 세운 진시황의 성공은 이전 시대 여섯 제왕의 국적과 출신을 묻지 않는 개방적인 인재 등용 전략을 계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효공은 위(衛)나라 상앙을, 혜문왕은 위(魏)나라 출신 장의를, 소양왕은 위(魏)나라 출신 범저를, 장양왕은 조(趙)나라 출신 여불위를 재상으로 등용해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모두 진나라에 맞선 적대국 출신이었다.

진시황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일등 공신은 바로 초(楚)나라 출신의 재상 이사였다. 이사는 “태산은 한 움큼의 흙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높은 산을 이룰 수 있고, 군주는 어떠한 백성도 뿌리치지 않아야 자신의 덕을 천하에 밝힐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범저는 “한 지방을 번창시킬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고, 한 나라를 번창시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고 했다. 야망이 큰 사람일수록 마땅히 인재를 천하 가운데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능력이나 실력보다 출신 국가나 출신 학교 심지어 출신 지역까지 따지는 지도자나 CEO가 있다면 최남과 진시황의 사례 그리고 이사나 범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 최남의 여섯 가지 경영 전략

일본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청년 시절부터 최남은 ‘큰 나무’가 되어 울창하게 가지를 치고 무성하게 크고 싶다는 ‘큰 꿈’을 지니고 살았다.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헤치고 재계의 거물이 된 최남은 1935년 잡지 『삼천리』(7월호)에 기고한 “십전균일점(十錢均一店)은 조선서 성공할 것이냐”라는 글에서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여섯 가지 경영 전략’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이 글은 『삼천리』 기자가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답했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여기에서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서비스와 마케팅을 개발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고 끊임없이 고민한 최남의 경영 비결을 읽을 수 있다.(이용선 저, 『조선 거상』, 동서문화사, 2005. p140 참조)

1. 상점의 경영방법을 아주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 합리적 경영이란 쓸데없는 비용을 단 한 푼이라도 적게 하는데 있다.

2. 점원은 능수능란하고 상품은 보다 더 좋게, 물건 값은 한 푼이라도 더 싸게 해야 한다.

3. 상점 경영자는 많이 파는 대신 되도록 이익을 적게 먹는 박리다매주의를 택하고, 그 대신 더 많은 일반의 구매자 즉 손님을 유치하는데 염두를 두어야 한다. 한 손님이 3원을 남기고 한 번 찾아오는 것 보다 1원을 남기고 세 번 찾아오는 편이 더 낫다.

4. 점포의 위치가 생명이다. 점포의 위치는 아주 번화하여서 누구나 지나다니기 쉽고 놀러 다니기 쉬운, 말하자면 교통이 사통팔달한 곳으로 해야 한다.

5. 상품을 진열할 때는 항상 금방 눈에 띄게 해 놓아야 한다. 손님이 그 점포에 들어서면서 “빵 있어요?”, “노트 있어요?” 하고 하나하나 묻게 하는 장사꾼은 상점학의 낙제생이다.

6. 그 시대의 유행에 뒤늦지 않게, 사계절 어떤 시기에도 어울리는 꼭 들어맞는 상품을 구비하여 놓아야 한다. 또한 항상 시대를 생각하되 시대를 더 세분해서 계절을 생각하고 더 치밀하게는 그 주일에 일어날 일, 행사, 아니 내일 어느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어느 곳으로 소풍을 간다든지 운동회를 하는 날은 언제인지까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듯 최남의 성공 사례와 ‘여섯 가지 경영 전략’은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서비스와 마케팅 기법의 개발이야말로 경쟁자 없는 새로운 시장과 고객을 창출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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