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야담은 권문세가와 양반사대부 체제에 저항하는 무기”
상태바
“조선 후기 야담은 권문세가와 양반사대부 체제에 저항하는 무기”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1.06 08: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④
▲ 유몽인의 『어우야담』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④

[한정주=역사평론가] 명종 때 권신(權臣)이자 간신(奸臣)으로 큰 영화를 누렸던 김안로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한강 가 동호(東湖: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 일대)에 화려한 정자를 짓고 ‘즐거움을 보존한다’는 뜻의 ‘보락당(保樂堂)’이라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당대의 문사였던 기재 신광한에게 축하 시를 지어달라고 했다.

신광한은 거듭 사양했지만 워낙 김안로의 청탁이 강경해 어쩔 수 없이 시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그 시의 구절은 언뜻 보면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 속뜻은 김안로의 행태를 기롱하고 풍자한 것이었다.

유몽인은 신광한의 시구(詩句)와 그 속에 감춰진 은미한 뜻을 기록해 세상 사람들이 권간(權奸) 김안로의 오만방자하고 어리석은 행태를 실컷 조롱하도록 했다.

“근세에 간신 김안로가 동호(東湖)에 정자를 새로 짓고는 ‘보락당(保樂堂)’이라 편액을 걸었다. 기재(企齋) 신광한에게 시를 부탁하여 기재가 사양하다가 결국 지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화려한 누각 새로 지었다는 소문 들었거니 / 푸른 창 붉은 난간 강가에 빛나리 / 아름다운 경물 또한 도견(陶甄)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 달밤의 피리 가락 도리어 비단옷 입은 이에게 어울리누나 / 진퇴에는 근심이 따르는 법인데 공은 즐거움 간직하고 / 벼슬길에 나아갈 뜻 없으니 나는 천진함 보전하네 / 안개 물결 낱낱이 살피자면 한가한 마음 있어야 하리니 / 다시 그 누가 있어 그대의 귀한 손님이 되려나.’

이 시는 대부분 풍자하고 기롱하는 뜻이다. ‘소문을 들었다’ 함은 그가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고, ‘아름다운 경물 또한 도견의 수중에 들어갔다’ 함은 조정의 모든 정사와 강산 전토(田土)가 전부 도견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말한 것이다.

‘달밤의 피리 가락 도리어 비단옷 입은 이에게 어울린다’ 함은 번잡하고 화려함은 본디 풍월(風月)에 어울리지 않고 부귀인에게나 마땅함을 말한 것이다. ‘진퇴에는 근심이 따르는 법인데 공은 즐거움 간직하고’라는 것은 옛 사람은 나아가거나 물러남에 모두 근심을 지녔는데 김안로는 홀로 즐거움을 누리고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벼슬길에 나아갈 뜻 없으니 나는 천진함 보전하네’는 자신이 이러한 시대에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없어 스스로 그 지조를 온전히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그 누가 있어 그대의 귀한 손님이 되려나’라는 구절은 자신은 보락당의 빈객이 됨을 원하지 않는데 그 어떤 사람이 권세에 아부하여 그의 빈객이 될 거냐는 것이다.

이 시는 구구절절 깊은 뜻을 지니고 있어 천 년 뒤에도 군자의 마음을 명백히 드러낼 만하다. 김안로 또한 문장에 깊은 식견이 있었으니 어찌 그 뜻을 몰랐겠는가? 그러면서도 끝내 신광한을 벌주지 못한 것은 당시 현자들에게 구실을 잡힐까 하여 그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유몽인, 『어우야담』

또한 유몽인은 음식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 대나무 통 속 가래침을 굴젓으로 알고 어린아이의 항문을 밀어 넣은 가지를 훔쳐 먹은 한양 사람의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세상에서 이익과 영달을 구하는 사대부가 탐식 때문에 더러운 가래침과 지저분한 오이를 먹은 이와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일침(一針)을 가한다.

“서울에 음식을 탐하는 한 사내가 있었는데 일이 있어 남양(南陽)의 개펄로 가게 되었다. 평소 남양에 굴젓이 많다고 들었는지라 그것을 맛보고자 마음먹었다.

그런데 주인집 대나무 통에 굴젓이 가득 있는 것을 보고서 굴젓은 가지와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 가지를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행랑 아래를 보니 반쪽이 있기에 통 속의 굴젓을 가져다 가지에 얹어 먹었다.

조금 있다가 해소와 천식이 심한 주인집 노인이 한참 기침을 하다가 가래를 뱉으려고 대나무 통을 찾으니 없는 것이었다. 또 설사병을 앓아 항문이 빠진 어린이가 있어 그 어미가 가지를 반으로 잘라 그것으로 항문을 밀어 넣었는데 지금 그 가지를 찾으니 간 곳이 없었다.

대개 이 나그네는 노인의 가래침을 굴젓으로 알고 빠진 항문을 밀어 넣었던 가지에 이를 얹어 먹은 것이다. 아! 세상의 이익과 영달을 구하고 음식을 탐하여 구차하게 먹는 자가 저 대나무 통을 뒤져 가지를 먹는 것과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몽인, 『어우야담』

가난한 선비가 재물에 눈이 먼 나머지 개천을 지나다가 번쩍이는 것이 생금(生金)인지 알고 행여 남에게 빼앗길까 봐 물에 뛰어들어 추위에 몸이 얼어붙는지도 모르고 애지중지 감싸 안고 황급히 집에 도착해보니 생금(生金)은 다름 아닌 개똥이었다.

그런데 이 선비의 말이 더 걸작이다. “복 없는 놈에게는 생금(生金)도 개똥이 되는구나!”

현실을 직시하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요행수나 바라고 타고난 운명만 탓하는 인간 특히 당시 선비 계층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꼬집는 한 편의 야담이다.

“한양에 가난한 선비가 있었는데 이름을 한장군(韓將軍)이라 하였다. 설에 낙산동(駱山洞)에서 친족에게 세배를 하고 밤에 인수교(仁壽橋)를 지나는데 개천 가운데 빛이 번쩍이는 게 금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말 모는 종에게 물었다. ‘너도 그 빛을 보았느냐? 틀림없이 생금(生金)일 것이다.’ 종이 말했다. ‘보았습니다. 제가 듣기에 생금은 쉽게 숨어 버리기에 이를 얻는 사람들은 반드시 잠방이를 벗어 그것을 덮는다 합니다.’

선비가 말에서 내려 잠방이를 벗고 물에 들어가 그것을 잡아 종에게 주지 않고 가슴에 품고 돌아가니 옷이 모두 얼어붙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금은 보이지 않고 개똥이 있을 뿐이었다. 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복 없는 놈에게는 생금도 개똥이 되는구나.’

다음 날 밤 다시 냇가에 가서 살펴보니 긴 행랑의 등잔 불빛이 창틈으로 새어 나와 물을 비추고 있었다.” 유몽인,『어우야담』

존귀(尊貴)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득달같이 모여들어 너나없이 누리려고 하는 세상 인심(人心)을 한바탕 비웃는 냉차에 얽힌 이야기도 해학과 풍자의 미학이 돋보이는 재미난 글이다.

“전라도 영암 군수가 관아에 앉아서 백성들의 가을 환곡을 받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때 날씨가 더웠던지라 군수가 소리쳐 말했다. ‘냉차를 내오너라.’ 차를 올리자 단숨에 한 그릇을 비웠는데 외딴 촌마을의 한 백성이 우러러보며 부러워했다. 그는 냉차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매우 맛있고 귀한 음료수가 아닌가 여겼다. 백성이 창고에 환곡을 다 들이고 난 뒤에 관아 뒤로 가서 냉차를 구해 마셔 보니 곧 시원한 숭늉 물인지라 크게 웃고는 돌아갔다.

얼마 뒤에 제독 교수(提督敎授)가 왔는데 제독(提督)은 문관(文官)이었다. 향교의 사람이 제독이 왔다고 소리쳐 전하니 촌백성은 제독이 곧 중국의 이씨(李氏: 이여송)와 동씨(董氏: 동일원) 같은 걸로 잘못 알고는 떼지어 모여들어 바라보았다. 고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곧 향교 훈도(訓導)를 일컫는 별칭이라고 했다. 촌백성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는 냉차와 같은 것이로구나.’” 유몽인,『어우야담』-

궁중의 연회에서 배우 놀이를 꾸며서, 임금 보다 앞서 재물을 챙기는 정승과 판서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는 명종(明宗)의 어리석음을 한바탕 비웃은 한양의 광대 귀돌이 이야기에 이르면 유몽인이 정승과 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던 임금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부터 배우 놀이를 꾸미는 것은 다만 그 예술적 아름다움만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를 깨우치고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의 우맹(優孟)이나 우전(優旃)도 이러한 인물이었다.

명종이 어머니를 위하여 궐내에서 풍정연(豊呈宴: 궁중 연회)을 차릴 때 서울의 배우 귀돌이가 배우 놀이를 꾸몄다. 풀을 묶어 풀단 넷을 만들었는데 큰 것이 둘이요, 중간 것이 하나요, 작은 것이 또 하나였다. 귀돌이가 자칭 수령이라고 하면서 동헌에 나와 앉아 진봉색리(進封色吏: 진상물을 관리하는 지방 아전)를 불렀다.

다른 배우 한 명이 제가 진봉색리라고 하면서 허리를 굽실거리다가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왔다. 귀돌이가 큰 풀단 하나를 그에게 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분부하였다.

‘이것은 이조판서님께 드리렷다.’ 또 풀단 하나를 그에게 주면서, ‘이것은 병조판서님께 드리고’하고 당부하였다. 다음에는 중간 것을 주면서, ‘이것은 대사헌님께 드리렷다’ 하고 맨 나중에야 작은 풀단을 집어 들고 ‘이것은 나라님께 진상하라’ 하였다. 정승, 판서 등 좌석에서 왕을 모시고 있던 자들이 모두 기가 질리도록 무안해하였다.” 유몽인, 『어우야담』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새롭게 개척하다시피 한 야담은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와 만개(滿開)한다. 야담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때 등장한 수많은 야담집 가운데에서도 『계서야담(溪西野談)』·『동야휘집(東野彙集)』과 더불어 『청구야담(靑邱野談)』을 소위 ‘3대 야담집’이라고 부른다.

순조 때 사람인 계서(溪西) 이희준이 기담(奇談)을 중심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 『계서야담』이고 『동야휘집』은 고종 때 사람인 이원명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야담과 패설(稗說)들을 모아 수집·편찬한 책이다.

‘3대 야담집’ 중 앞의 두 책은 작자와 연대가 뚜렷한 반면 『청구야담』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청구야담』에 실린 각종 민담과 야담들이 1700~1800년대의 사회 현실과 풍속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19세기에 나왔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료함을 깨는 심심풀이 이야기’라는 『파적(破寂)』이나 ‘잠을 쫓을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라는 뜻의 『파수록(罷睡錄)』은 음담패설과 각종 진기(珍奇)한 야담, 해학과 재치가 넘치는 설화로 꾸며져 있는 책이다. 특히 『파수록』은 ‘잠을 막아줄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라는 『어수록(禦睡錄)』과 함께 음담패설과 해학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인기를 모았던 야담집이다.

특히 여기에 실려 있는 음담패설과 해학은 단순한 우스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기투환심(妓妬還甚: 기생의 질투만 모질게 돌아오다)’이라는 제목의 이야기에는 지방 수령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기생들과 불법적으로 관청 내에 살림을 차리는 일을 예사로 알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리고 여러 기생을 들여놓은 충청도의 한 지방 관리가 기생들이 서로 질투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이 기생 저 기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해학적으로 묘사해놓았다. 성에 대한 흥미와 날카로운 사회 풍자와 비판을 적절하게 혼합해 놓아 백성들에게 읽는 재미와 더불어 통쾌한 감정까지 느끼게 해준 셈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 야담은 사회 풍자와 비판을 통해 권문세가와 양반사대부 체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무기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