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갑오농민군으로 이어진 다산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
상태바
동학과 갑오농민군으로 이어진 다산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2.28 0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⑤
▲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군.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⑤

[한정주=역사평론가] 정약용은 비록 토지개혁을 주요하게 여긴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계보를 이었지만 당시 크게 발달한 시장과 상품·화폐경제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만 그의 상업관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적극 장려한 유수원이나 박제가와 같은 중상주의 경제학자와는 사뭇 달랐다.

즉 중상주의 경제학파가 상업과 상인을 중심에 둔 상업관을 펼쳤다면 정약용은 농업과 농민을 중심에 둔 상업관을 펼쳤다. 정약용은 농촌의 상업 활동과 상업적 농업을 경영하는 농민에 초점을 맞춰 상업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상업적 특권을 누리고 매점매석을 일삼는 부상(富商) 혹은 도고(都賈)들의 상업 활동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상업관은 중농(重農)의 취지와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업 옹호론이었고 국가(관청)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시장 질서를 다스리고 상업적 특권과 독점적 이익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업 통제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장과 상업 활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성호 이익과 시장경제와 상업 활동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유수원과 박제가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약용은 농업 경영의 개선과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관련해 ‘상업적 농업’에 관심을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자급자족이나 생계유지 수단으로서의 곡식이나 작물 재배를 넘어선 상업적 이윤 추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더욱이 매우 전문적이고 특화된 상업적 농업 경영을 권장하면서 고용 노동력을 이용한 상업 이윤의 추구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모시·삼·참외·오이 등과 온갖 채소와 약초를 심어서 잘만 가꾼다면 한 고랑의 밭에서 얻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다. 도성 안팎과 큰 도시의 파·마늘·배추·오이 밭 등은 10묘의 땅에서 얻은 수확이 돈(錢) 수만을 헤아린다(10묘는 논 4마지기이고, 돈 1만은 100냥이다).

서도(西道)의 연초 밭, 북도(北道)의 삼밭, 한산(韓山)의 모시 밭, 전주(全州)의 생강 밭, 강진(康津)의 고구마 밭, 황주(黃州)의 지황(地黃) 밭 등은 모두 최고 등급의 논과 비교해도 그 수확의 이익이 10갑절이나 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삼을 또 밭에다 심어서 그 남는 이익이 혹 천만이나 되는데, 이것은 논밭의 등급으로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중략)… 무릇 이와 같은 종류의 작물들을 해마다 심고 직업으로 삼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은 토지의 비옥함 혹은 메마름과는 관계가 없다.” 정약용, 『경세유표』 ‘전제 11(田制十一)’ 중에서

이렇듯 정약용은 농촌을 둘러싼 시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중농의 취지에서 자영농민의 경제적 안정과 부의 축적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주-소작 관계의 봉건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신분의 자영농민이야말로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토양이자 자양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 비록 봉건체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들이더라도 봉건적 지주-소작 관계의 해체와 독립 자영농민의 육성을 지향했다는 그 개혁론의 성격 때문에 근대의 징후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은 19세기 후반 이후 ‘반봉건과 근대화’의 기치를 내건 정치세력이라면 반드시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의 해체와 토지개혁을 중요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때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토지개혁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 정약용이 주창한 토지개혁론의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입은 정치 세력을 찾는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그들은 동학(東學)과 갑오농민군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비록 실패와 좌절로 끝났지만 ‘밑으로부터의 반봉건과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대표적인 역사적 경험으로 평가받는다. 이때 갑오농민군이 내건 ‘반봉건과 자주적 근대화’의 핵심 강령은 다름 아닌 ‘농민(토지) 혁명’이었다.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해체하고 모든 토지를 고루 나누어 경작한다는 것이 그들이 내건 핵심적인 가치였다. 이러한 갑오농민군의 토지혁명 강령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것이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이었다.

이와 관련 북한의 역사학자 최익한이 저술한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책에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정약용이 현재 전해오는 『경세유표』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성향을 띤 별본(別本) 『경세유표』를 비밀리에 써서 초의선사에게 전했는데, 그 책이 전봉준과 김개남 등 갑오농민군의 지도자들에게 들어가 ‘농민(토지)혁명의 강령’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다.

“(전라남도) 강진지방의 야사에 의하면 정약용의 저서로서 현행본 『경세유표』 이외에 별본이 있었던 것 같다. 『강진읍지』 ‘명승초의전(名僧草衣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초의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도교(道交; 학문적 동지)다. 다산이 유배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 이청(李晴)과 초의에게 주어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남상교·남종삼 부자와 홍봉주 등에게 전해졌고,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해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전봉준), 김개남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갑오년)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전봉준 일파의 비적(匪賊)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다산의 실학에 대한 간단한 재론’ 중에서

별본 『경세유표』가 실제 존재했는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이러한 얘기가 민간에 널리 퍼진 까닭은 정약용의 경제사상이 그만큼 갑오농민군의 ‘농민혁명’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갑오농민군이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목표로 삼은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을 이은 계승자였음을 입증해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