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공동체 건설의 전혀 새로운 경제 발전 전략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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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공동체 건설의 전혀 새로운 경제 발전 전략 제시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2.08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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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②
▲ 경기도 남양주 다산유적지 내 정약용 동상.

[조선의 경제학자들] 중농주의 경제학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②

[한정주=역사평론가] 반계 유형원 이후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은 토지겸병(대토지 소유)과 지주-소작 관계의 확산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이 즉각 시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균전론(均田論), 한전론(限田論), 둔전론(屯田論) 등은 모두 이러한 와중에 나온 대표적인 토지개혁론이다.

그런데 이들 토지개혁론은 비록 제한적인 수준이지만 모두 지주적 토지 소유의 잔존과 농민이 아닌 사람의 토지 소유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1799년 ‘전론’에서 최초로 주장한 토지개혁론인 ‘여전론(閭田論)’은 일절의 토지 사유(私有)를 허용하지 않고 또한 농사짓는 사람에게만 토지 점유권과 경작권을 준다는 점에서 이들 토지개혁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특히 정약용은 여기에서 유형원과 이익 등 이전 세대의 경제학자들이 제기한 토지개혁론의 문제점과 실현 가능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자신의 토지개혁론(여전론)을 펼쳐 보임으로써 중농주의 경제학의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먼저 정약용은 모든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이 이상(理想)으로 삼은 고대 중국 정전제(井田制)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제도가 한전(旱田: 밭)이나 평전(平田: 평지의 논밭)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이미 수전(水田: 논)이나 산과 계곡을 개간해 경작지로 삼은 조선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장차 정전제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정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정전이란 한전이다. 수리시설이 이미 되어 있고, 메벼와 찰벼를 이미 맛있게 먹고 있으니 어찌 수전을 버릴 수 있겠는가? 정전이란 평전이다. 산의 벌목에 힘써서 산과 계곡이 이미 개간되었는데, 평지의 논밭을 제외한 산과 계곡의 나머지 토지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2(田論二)’ 중에서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라고 할지라도 이미 변화한 현실에 맞지 않다면 채택할 수 없다는 정약용의 ‘실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정약용은 반계 유형원의 ‘균전론’ 역시 인구와 가구 수의 변동 혹은 토지의 질과 비옥도의 차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토지개혁론이라고 비판한다.

“장차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균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균전이란 토지 외 인구를 계산하여 이를 균분(均分)하는 것이다. 그런데 호구의 증가와 감소는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변한다. 그러므로 올해에는 갑율(甲率)로써 분배하고 내년에는 을율(乙率)로 분배해야 하는데, 그 터럭과 같은 차이는 교묘하여 살필 방법이 없다.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의 구별 또한 밭두렁마다 일정하지 않은데, 어찌 균등할 수가 있겠는가?”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2(田論二)’ 중에서

그럼 이익이 주장했던 ‘한전론’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약용은 토지 사유제를 허용하면서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토지 거래를 제한하는 방식은 현실에서는 온갖 편법과 탈법을 낳아 시행되기 어렵다고 보았다. 즉 그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토지를 몰래 소유하는 이른바 ‘차명(借名) 거래’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전론’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장차 한전제(限田制)를 시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한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한전이란 토지를 매각함에 있어 일정한 한도에 이르면 더 이상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내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서 토지를 한도 이상으로 늘인들 누가 알 것인가! 또한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빌어서 토지를 한도 이하로 줄인들 누가 알 것인가! 그러므로 한전제는 시행할 수 없다.” 정약용, 『여유당전서』 ‘전론 2(田論二)’ 중에서

이렇듯 정전제, 균전론, 한전론 등의 토지개혁론을 차례차례 비판적으로 살펴본 다음 정약용은 모든 토지를 국가 소유로 하고 농민을 ‘여(閭: 촌락)’ 단위로 집단화하여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각자의 노동량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하는 ‘여전론(閭田論)’이라는 새로운 토지개혁론을 주창한다. 이렇게 할 때에만 지주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 재정의 곤란과 농민의 궁핍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대토지 소유와 지주-소작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당시의 농업 경제체제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토지 공유제와 자영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완전히 새로운 경제 발전 전략이었다.

이 때문에 해방 이후 조선 후기 사회경제사를 개척하다시피 한 김용섭 교수는 “그때까지 나와 있는 여러 가지 토지개혁론 중 가장 합리적이고, 개혁 방안으로서 가장 철저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중농주의 경제학파가 이상적인 제도로 여겼던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여전론만큼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반영한 토지개혁론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토지개혁의 이상과 원칙에 철저했던 만큼 여전론은 그만큼 실행에 옮기기 곤란한 난제(難題)였다. 특히 정조대왕 사후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정치적 상황은 지주들의 이익을 훼손하는 어떤 토지 정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권력을 장악한 세도 가문들이 직접적으로 대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정약용은 유배 생활 중이던 1817년 저술한 『경세유표』에서 앞선 ‘전론’에서 주장한 여전론과는 다른 ‘정전론(井田論)’을 제시했다.

정전론은 현실적으로 지주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되 전국의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하고, 이 아홉 구획으로 나눈 정전(井田) 중 8/9는 사전(私田)으로 하고, 나머지 1/9는 공전(公田)으로 삼아 국가에 세금을 바치도록 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때 국유지나 특정 지역의 토지는 즉시 정전제를 실시하지만 부호나 지주가 소유한 토지는 정전으로 편입될 공전 1/9 부분만 국가에서 사들인다. 또한 부호나 지주가 소유한 토지를 국가가 점차적으로 사들여 정전으로 편입해 빈농(貧農) 혹은 무전농(無田農)들에게 분배하여 경작하도록 하는 한편 국가에서 사들이지 못한 지주 소유의 토지에 대해서는 소작농들이 골고루 소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병행했다.

이와 같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부호나 지주의 토지 소유를 줄여 나가고 빈농·무전농·소작농의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면서 점차 독립 자영농으로 육성해 궁극적으로는 토지개혁의 이상인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을 완성해나간다는 것이 ‘정전론’의 대강이다.

이렇듯 정전론은 정약용이 관료 시절 ‘전론’을 통해 주장한 ‘여전론’보다 크게 후퇴한 토지개혁론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개혁의 큰 꿈과 뜻을 함께 한 정조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개혁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관료 정약용과 머나먼 유배지에서 ‘실현 가능한’ 사회개혁의 청사진을 모색한 유배객 정약용이 처했던 입장과 상황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물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전론이 여전론보다 뒤늦게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이 ‘후퇴했다거나 현실과 타협했다’고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 오히려 김용섭 교수의 지적대로 “여전론은 정전론을 넘어서는 이상적 개혁사상이었다고 하겠으며, 정약용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한 것도 여전론으로써 개혁되는 경제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여전론이야말로 17세기 이후 등장한 여러 토지개혁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칙을 가장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구현한 중농주의 경제학의 ‘집대성이자 완성품’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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