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 토지개혁론의 독보적 경제사상…『과농소초』·『한민명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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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토지개혁론의 독보적 경제사상…『과농소초』·『한민명전의』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1.16 0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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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⑤
▲ 경남 함양 상림 역사인물공원에 조성된 연암 박지원 흉상과 상업적 농업 경영과 구체적인 영농 기술 및 농기구 개선의 문제를 다룬 실용 농서 『과농소초』.

[조선의 경제학자들]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⑤

[한정주=역사평론가] ‘농서대전(農書大全)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해야 한다.’

일찍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과거시험을 통한 정치적 출세의 길을 버렸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에 박지원은 나이 50세에 정조의 선처로 음관(蔭官)의 특전을 입어 관직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55세에는 안의 현감직을 맡아 비록 미약하나마 자신이 평생 익히고 연구한 ‘이용후생의 학문과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곳에서 그는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편리한 기구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 개선과 생산력 향상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제도와 도구들을 보급하거나 제작했다. 그것은 평소 그가 품어온 청나라의 ‘선진 제도와 과학기술’을 생산 현장에 적용하는 경제 사업이었고, 또한 그가 평생 원칙으로 삼은 ‘이용후생’의 경제사상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안의현에서 박지원이 행한 사업에 관한 내용은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저술한 『과정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께서는 연경(북경)에 들어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이로움을 기구들을 자세하게 관찰하셨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이 기구들을 모방해 제작하여 널리 나라 안에서 쓰일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탓에 정작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셨다.

마침내 안의읍에 부임하셔서 재주와 기술이 있는 공장(工匠)들을 가려 뽑아 손수 가르치며 양선(풍력을 이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 베틀, 용골차(논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수차), 용미차(관개용 수차),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들을 제조하여 시험하셨다.

모두 힘을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민첩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 한 사람이 수십 명이 하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 그것들을 모방해 제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라 안에서 쓰임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박종채, 『과정록』 중에서

경남 안의현에서의 작은 실험 이후 충청도 면천군수로 자리를 옮긴 박지원은 농정(農政)에 필요한 농서(農書)를 구하는 정조대왕의 어명을 좇아 상업적 농업과 과학적 영농기술 및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를 다룬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을 저술해 ‘농업 및 토지개혁’에 관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해가 1799년(정조 23년)으로 박지원의 나이 62세 때였다. 박지원이 사망하기 7년 전에 저술한 이 농서로 인해 그는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리더이면서 또한 중농주의 경제학파를 대표하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과 더불어 ‘농업 및 토지개혁론’을 주창한 독보적인 경제사상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는 박지원의 농업 및 토지개혁 사상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데 전자가 상업적 농업 경영과 구체적인 영농 기술 및 농기구 개선의 문제를 주로 다룬 실용 농서에 가깝다면 후자는 토지제도 및 대토지 소유의 폐단을 본격적으로 다룬 정책 및 토지개혁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종채의 『과정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개성 연암협에 기거하던 시절부터 우리나라의 농서와 중국의 농서들을 연구하고 발췌해 기록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청나라 연행 길에서 견문한 사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시행할 만한 것’들을 덧붙여 『과농소초』 14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과농소초』는 ‘농기구, 경작과 개간, 거름과 비료, 수리(水利), 곡물 선택과 파종(播種), 수확, 목축’ 등 실제 농업 경영에 필요한 모든 항목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박지원은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사 기술을 개선하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영농법을 도입해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각종 대책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농기(農器)’에서 박지원은 조선의 농서 중 최초로 농기구 56종을 소개하는 한편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기구 100여 종의 장점과 단점을 논한 다음 당장 사용해야 할 28종의 성능을 소개하면서 적극적인 채용을 촉구했다.

『한민명전의』는 박지원이 전제(田制)와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따로 의견을 적어 『과농소초』에 부록으로 덧붙여놓은 글이다. 『과농소초』에 붙어 있는 부록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글이 『과농소초』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박지원의 토지개혁사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에 의한 전제의 문란이 나라 재정이 궁핍하고 백성이 가난한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 다음 반드시 토지 소유를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시행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토지 소유를 제한한 다음에야 토지겸병이 사라질 것이고, 대토지 소유가 사라진 다음에야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하게 된 다음에야 백성들이 모두 각자 자신의 토지를 경작해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구별이 드러날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구별이 드러난 다음에야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할 수 있고 또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지원, 『한민명전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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