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어리석고 둔해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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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어리석고 둔해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20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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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③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⑨…역설(逆說)의 미학③

[한정주=역사평론가] 강희맹이 자식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지은 다섯 가지 설(說)을 살펴보면 그가 역설의 화법과 반어의 수사법을 얼마나 잘 구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설득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화법과 수사법이 다름 아닌 ‘역설(逆說)’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강희맹이 쓴 ‘훈자오설(訓子五說)’ 중 ‘등산설(登山說)’은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삼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용맹과 재주와 기예가 뛰어나기보다는 차라리 어리석고 둔해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역설의 가르침을 준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백성이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그 중 첫째는 착실했지만 다리를 절었고, 둘째는 호기심이 많았지만 몸이 온전했고, 셋째는 경솔했지만 민첩하고 용맹함이 다른 사람보다 나았다. 그래서 항상 일을 하면 셋째가 으뜸을 차지하고, 둘째는 그 다음이며, 첫째는 부지런하게 일을 해 간신히 자신이 맡을 일을 감당할 뿐이었다.

하루는 둘째가 셋째와 더불어 태산의 일관봉에 누가 먼저 오를지를 두고 내기하였다. 두 사람이 경쟁하듯 신발을 갖추니 첫째 또한 행장을 꾸려 산에 오르기로 했다. 둘째와 셋째는 서로 돌아보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태산의 일관봉은 구름 밖으로 솟아나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리 힘이 튼튼한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오를 수 없는데 절름발인 몸으로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첫째는 웃으면서 ‘그저 너희들을 따라 올라가다 마지막으로 다다르더라도 천만다행으로 여기겠다’고 응수했다.

삼형제가 태산 아래에 이르자 둘째가 셋째와 더불어 첫째를 경계하며 ‘우리 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골짜기도 한순간에 뛰어오른다. 그러니 첫째 형이 먼저 산에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첫째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셋째는 산 아래에 있고, 둘째는 산 중턱에 이르렀는데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두워졌다. 그러나 첫째는 천천히 쉬지 않고 올라 산의 정상에 다다라 밤에는 관(館) 아래에서 자고 새벽녘에는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구경했다.

삼형제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그들에게 제각각 무엇을 얻고 왔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셋째는 ‘제가 산기슭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하늘 높이 떠 있어서 스스로 민첩한 힘만 믿고 계곡과 사잇길을 두루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또한 예쁜 꽃과 기이한 풀을 어느 것 하나 캐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서성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둠이 갑자기 몰려와 결국 바위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구슬픈 바람 소리가 귀를 때리고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며 여우나 늑대를 비롯한 밤 짐승이 울부짖으며 돌아다녀 무섭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 한번 달려볼까 했으나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날까 무서워 그만두었습니다’고 했다.

또한 둘째는 ‘저는 여러 봉우리가 소라 껍질처럼 늘어서 있고 청색 절벽이 쇠를 깎은 듯해서 나는 듯이 달려 높은 곳도 오르고 늘어선 봉우리와 고개를 낱낱이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높고 가파른 봉우리가 점점 더 많이 나타나 마음이 더욱 급해졌습니다. 다리 힘이 빠져 겨우 산 중턱에 이르자 해가 벌써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바위 밑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옷은 싸늘하고 신발은 젖어 있었습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자니 아직도 아슬아슬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자니 또한 너무 멀어서 그저 주저앉아 있었을 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첫째는 ‘저는 다리가 다른 사람처럼 성하지 못하고 걸음걸이가 뒤뚱뒤뚱하므로 곧장 한 길을 선택해 한 걸음도 쉬지 않고 오른다고 해도 하루해가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옆길로 가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마음과 힘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오르고 또 올라 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오르고 있는데 따라온 사람이 말하길 이미 산의 정상에 다다랐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하늘을 우러러보니 해라도 맞닿을 듯하고 허리를 굽혀 쌓인 수풀을 보니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울창했습니다. 모든 산을 신하로 거느린 듯하고 모든 골짜기는 주름진 듯하고 지는 해는 바다에 잠겼습니다. 인간 세계가 새까맣게 어두워져서 옆을 보면 별들이 서로 빛을 발해 손에 담긴 이치를 볼 수 있을 만큼 환해 참 즐거웠습니다.

누워서 편안히 잠을 청할 사이도 없이 금계(金鷄)가 한 차례 울자 동쪽 하늘이 환히 밝아왔습니다. 검붉은 빛이 바다에 깔리고 금빛 물결이 하늘로 솟구쳐 붉은 봉황과 금빛 뱀이 그 사이에 요란하더니, 이윽고 붉은 바퀴가 구르고 굴러서 잠깐 오르내리다가 눈 한번 깜짝하는 순간에 엄청나게 밝은 빛이 떠올랐습니다. 참으로 절묘하고 기이했습니다’고 했다.

삼형제의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는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로(子路)의 용맹과 염구(冉求)의 재주와 기예로도 공자의 담장 수준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리석고 둔했던 증자는 마침내 얻었으니 너희들은 새겨 두어라’라고 했다.

덕업을 갈고 닦고 나아가는 순서와 공명을 이루는 길은 모두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고 아래에서 위로 가게 마련이다. 자신의 힘만 믿고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말고 힘을 게을리 해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리를 저는 사람이 스스로 힘쓰는 자와 같을 것이니 소홀히 여기지 말라.” 강희맹, 『사숙재집(私淑齋集)』, ‘훈자오설(訓子五說)’ 중 ‘등산설(登山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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