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부국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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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부국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10.12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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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사대부출신 대상인(大商人)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④
▲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 토정 이지함(왼쪽)과 체제 개혁론으로 유지를 계승한 제자 조헌(가운데). 박제가(오른쪽)는 우리나라를 개혁해 중국 수준으로 올리고자 노력한 사람은 최치원과 조헌 두 사람뿐이라고 칭송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사대부출신 대상인(大商人)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④

[한정주=역사평론가] 삼대부고론(三大府庫論)은 이지함이 독창적으로 주창한 ‘조선의 국부론(國富論)’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지함은 임금(지도자)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길에는 상·중·하의 세 가지 곳간(창고)이 있다고 말했다. 삼대부고론 역시 앞서 소개한 이지함이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문’에서 자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먼저 부국안민의 상책(上策)은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人心)을 올바르게 하는 대책이다.

이지함은 ‘도덕지부고(道德之府庫)’란 그 크기가 끝이 없고 온갖 재물이 들어 있어 만약 임금이 법칙을 세운 다음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쓸 수 있을 만큼 아낌없이 베푼다면 백성들 역시 자신의 창고를 손수 열어 임금이 세운 법칙이 지켜질 수 있도록 보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이 재물을 더불어 모으고 나누어 한 고을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나라의 백성이 배불리 먹고 풍요롭게 사는 ‘대동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해석해본다면 ‘상생과 나눔의 경영’, 즉 더불어 잘사는 공동체 경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이 이 대책을 상책(上策)으로 삼은 것만 보아도 그의 경제 철학이 특정 사회 계층의 희생을 감수하는 일방적인 경제 성장이 아닌 더불어 발전하고 함께 잘 사는 균등한 경제 성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지함은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고 적재재소에 배치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 경영을 부국안민을 위한 경제 대책의 중책(中策)이라고 보았다.

아무리 좋은 경제 대책을 세워도 지도자가 어질지 못하고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무용지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온 세상의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대해(大海)를 이루듯 천하의 어질고 현명한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인재지부고(人才之府庫)’를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

이지함의 평소 주장과 행적을 통해 볼 때 인재의 창고를 활짝 연다는 의미는 다름 아닌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뛰어넘어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발탁하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상공업을 활용해 새로운 국부를 개발할 때 평생 서책만을 들여다 본 양반 사대부 출신이 인재일지 아니면 평생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해 온 상인과 수공업 장인이 인재일지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국안민을 위한 경제 대책의 하책(下策)이란 육지와 바다를 이용해 온갖 재물을 생산해 저장하는 창고를 여는 것이다. 특히 이지함은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 상책인 ‘도덕지부고’나 중책인 ‘인재지부고’는 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하책만은 적극적으로 실시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생산하고 간직하는 창고이기 때문에 이것에 의존하지 않고 일찍이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진실로 이 재물을 개발하고 생산해낼 수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로움이 끝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면서 비록 농업이 민생의 근본이고 상공업과 어업이나 광업이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취할 것은 취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성인(聖人)이 행하는 권도(權道: 상황 변화에 따라 행하는 대책)이므로 반드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했다.

재물을 탐하고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는 욕망을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부국안민에 도움이 된다면 비록 하책(下策)일지라도 나라 정책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당시 시각으로는 대단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물을 생산하고 부(富)를 축적하는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는 새로운 경제사상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실제 삼대부고론의 세 가지 대책 중 이지함이 가장 힘써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하책인 ‘육지와 바다를 이용한 재물의 개발과 생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풍조와 특히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는 명분을 무엇보다 중요시했기 때문에 재물을 생산하고 간직하는 창고를 형식상 가장 낮은 하책으로 삼은 듯하다.

여하튼 이지함이 부국안민을 위해 제시한 경제사상인 삼대부고(三大府庫)란 바다와 육지의 재물을 적극 개발·생산하는 ‘자원 경영’,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인재 경영’,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잘 사는 ‘공동체 경영’이라고 하겠다.

이 삼대부고론은 오늘날에도 국가의 경제 성장과 균등 분배 정책의 원칙으로 삼아도 될 만한 경제 철학을 담고 있다.

◇ 이지함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보통 18세기에 만개(滿開)한 실학의 선구자로는 『지봉유설』을 저술한 이수광(1563~1628년)을 꼽는다. 그러나 현재 많은 역사학자와 경제사학자들이 토정 이지함의 사상을 실학의 개조(開祖) 혹은 첫 선구자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이지함의 경제사상은 유수원과 박제가처럼 양반 상인이나 해외 통상을 적극 주창한 중상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사상의 원천’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제가는 자신이 직접 쓴 『북학의』 서문에서 “어렸을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했다”고 했는데, 그 까닭은 우리나라의 풍속과 체제를 개혁해 중국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지어 박제가는 우리나라를 개혁해 중국 수준으로 올리고자 노력한 사람은 오로지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 두 사람뿐이라고까지 칭송했다. 중봉 조헌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700여명의 의병을 이끌다 장렬하게 전사한 ‘700의총’의 의병장인데 토정 이지함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고 또한 스승의 뜻을 가장 잘 계승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박제가가 칭송한 조헌의 체제 개혁론은 이지함의 유지(有志)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헌은 스승 이지함이 사망하기 4년 전인 1574년 질정관(質正官)의 신분으로 중국 연경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는 귀국 후 임금에게 ‘동환봉사(東還奉事)’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앞서 소개한 이이의 상소문과 이지함의 상소문에 담겨 있는 시무책(時務策), 곧 개혁 정책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박제가는 이처럼 중국의 선진 문물을 보고 돌아와 부국안민을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조헌의 뜻을 높이 평가한 것인데, 그것은 또한 조헌의 스승인 이지함을 높여 칭송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박제가의 『북학의』에 담겨있는 부국강병론은 이지함이 주창한 ‘부국안민론’의 상공업 발전과 해외 통상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또한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이 저술한 최대의 실학 백과전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반계 유형원의 언급을 인용하면서 이지함의 해외 통상론을 크게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토정 이지함은 18~19세기 북학파 등 중상주의를 지향한 실학자와 경제학자들에게는 큰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모두 이지함의 전례(前例)를 좇아 상공업의 발전과 해외 통상을 통해 조선을 부국강병과 부국안민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토정 이지함은 조선사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임과 동시에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한 조선사 최초의 경제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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