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도 청황적백 여러 빛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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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도 청황적백 여러 빛깔이 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9.2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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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⑨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⑧ 소품(小品)의 미학⑨

[한정주=역사평론가] 홍길주는 ‘수여(睡餘)’, 즉 ‘잠자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 그때그때 떠오르거나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을 모으고 궤적을 붙잡아서 일종의 연작 수필집이자 수상록이라고 할 수 있는 ‘수여방필(睡餘放筆)’, ‘수여연필(睡餘演筆)’, ‘수여난필(睡餘瀾筆)’, ‘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 등에 엄청난 양의 소품문을 남겼다.

먼저 홍길주는 1835년(순조 35년) 나이 50세 때 19일 만에 124개의 글을 떠오르는 대로 쓰고 ‘수여방필’이라 제목 붙인 다음, 그것을 쓰게 된 전후 사정을 이렇게 밝혀 두었다.

“일없이 지내면서 책을 뽑아들고 베개를 베고 있자니 졸음을 물리칠 방법이 없는 것이 괴로웠다. 문득 벌떡 일어나 붓을 들고 공책에다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19일 만에 124항목을 얻었다. 현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도 없고 사물을 널리 상고하여 살펴본 것도 없다. 단락은 뒤죽박죽 차례도 없고 문장도 거친 채로 꾸미지 않았다. 하인이 장독 뚜껑을 덮기에나 꼭 알맞지 싶다. 잠시 기록하여 남겨두고 ‘수여방필’이란 제목을 붙인다.”

이제 ‘수여방필’ 속 소품문을 잠깐 살펴보자.

“사람들은 일체의 사물과 마주하여 번번이 현혹되어 많은 생각을 낭비하게 된다. 상황이 지난 뒤에 시험 삼아 다시금 헤아려보면 다만 마땅히 이와 같을 뿐 특별히 다른 이치가 없다. 그제야 당초에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 멋대로 장황하게 펼친 것을 알게 되니 모두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꿈속의 기이한 경계는 잠을 깬 뒤에도 내 몸이 여전히 이 경계 속에 있는 듯 하나 말로는 한 글자도 형용할 수가 없다. 또 혹 눈앞에서 만난 경치가 완연히 옛날에 이미 지나쳤던 곳과 비슷한데도 또한 언어로 표현해낼 수가 없다. 이것은 모두 문장의 깨달음에 있어 지극히 미묘한 지점이다. (또 혹 마주친 경계가 완연히 옛날에 꾼 꿈에서 본 바와 비슷한데 기억하려 해도 시원치 않은 경우도 있다.)

대가(大家)와 거공(鉅工)이라도 버릴 작품이 없을 수 없고, 아이라도 재주가 있다면 신통한 말이 없으란 법이 없다. 그러니 한 구절 한 마디로 남에게 칭찬을 받았다 해서 스스로 뽐낼 수 있겠는가.

남에게 놀림을 받고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재주와 능력이 부족한데도 자부심이 너무 지나친 까닭에 놀리는 자가 이를 틈타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방법이 있다. 다른 사람의 식견이나 문장을 살펴보아 모두 나보다 나을 것 같으면 나에게 식견과 문장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식견과 문장을 살펴보아 나만 못할 것 같으면 나에게 식견도 문장도 없음을 알게 된다.

내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다. 한번은 덕옹(德翁) 상득용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진실로 훌륭한 스승을 얻었네. 자네의 스승이 정말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기는 하지만 일단의 묘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비밀로 해서 남에게 일러주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지.’ 덕옹은 무인인 까닭에 그 말이 흔히 정곡을 뚫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말은 거의 나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았다. 그러나 묘한 깨달음이 있는 것을 어찌 남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와서 배우는 자 또한 오성(悟性)이 없어 성취한 바가 몹시 거친 것을 괴로워했다.”  홍길주, ‘수여방필’ (홍길주 지음, 정민‧강민경‧박동욱 외 옮김,《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 - 홍길주의 수여방필 4부작》, 돌베개, 2006. 인용)

10월 하순 무렵 19일 만에 ‘수여방필’을 쓴 홍길주는 같은 해 동짓달 무렵 마음속에 오가는 것들을 붓이 가는 대로 써서 다시 ‘수여연필’을 엮어냈다. 그리고 그 글들을 쓰게 된 사연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내가 ‘수여방필’ 짓기를 열흘 남짓 만에 마쳤다. 수십 일이 지나자 더욱 한가해졌다. 쓰다 만 글자와 남은 말이 마음속에 오가는 것이 그래도 많았다. 그래서 붓 가는 대로 써서 상자에 넣어두었다. 153항목을 얻고 이름 하여 ‘수여연필’이라 하였다. 다시 살펴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한당(漢唐) 이래로 명유(名儒)와 거공(鉅工)이 지은 것을 읽어보면 마치 앞사람이 미처 궁구하지 못한 바를 편 듯하지만, 그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육경(六經)과 선진(先秦) 시대 글에 주석을 단 것일 뿐이다. 이제 내가 스스로 혼자만 깨달은 독창적인 논의로 남의 이목을 새롭게 했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한당 이후의 책을 부연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어찌 남겨둘 만한 것이겠는가? 하지만 세대가 내려올수록 글은 더욱 낮아져서 뒷사람이 지은 바가 또 이 책을 풀이한 것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지금 사람의 작품은 진실로 옛사람을 능가하여 그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옛사람이 다하지 못한 남은 뜻을 채워 옛사람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처럼 한다면 또한 좋은 책이라 하겠다. 내가 이 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 그들이 참되고 간절한 마음을 발휘한다 해도 내가 글 쓸 때에 마음속에 있던 것을 헤아리는 것은 백에 한둘도 안 될 것이니 하물며 후세이겠는가.”

그럼 ‘수여연필’ 속 청언 소품들을 약간이나마 살펴보자.

“사람은 그 운명의 길하고 막힌 것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불우한 때에 억지로 영리를 구하다가는 종종 스스로 화(禍)와 실패를 만나게 된다. 내가 서른 살 이전에는 한 해도 멀리 떠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비를 만나는 일은 좀체 없었다. 한번은 3천여 리를 가는데 비를 만난 것을 헤아려보니 겨우 삼십 리뿐이었다. 서른 살 이후로는 대문을 나선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삼 일 볼일로 집을 나가 있을 때도 반드시 한 차례씩은 큰 비바람을 만나곤 했다. 내가 운수가 막혔을 때는 감히 영리를 도모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는 줄 알게 된 것은, 반드시 이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남에게 얼굴을 맞대고 소리 질러 나무람을 받을지언정 등 뒤에서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면전에서 배척받아 모욕을 당할망정 등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아서는 안 된다. 남에게 마주 보며 핍박당해 쫓겨날지라도 등 뒤에서 빈축을 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고 남과 함께하는 즈음에 언제나 매우 두려워하는 바가 이것이다. 감히 잠시라도 염려를 늦출 수 없는 것은 이 세 가지 일에 있다.

일 중에 오늘 해도 되고 열흘 뒤에 해도 되는 것이 있다면 오늘 즉시 해치운다. 오늘 해도 괜찮고 일 년이나 반 년 뒤에 해도 괜찮은 것이라면 한쪽으로 치워둔다. 이것이 일을 더는 중요한 방법이다.

다산이 책을 저술하여 집에 정돈해둔 뒤에 중국 사람이 지은 책을 보다가 자기의 주장과 같은 것이 있으면 곧장 지은 것을 꺼내어 표시해두곤 했다. 남이 한 말을 답습하기를 부끄러워함이 이와 같았다.

우리 집 연못에 붕어를 길렀다. 하루는 잡아다가 반찬으로 하려 했다. 장별제(張別提)란 이가 있었는데 과거 시험장에서 늙은 선비였다. 그가 문득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람은 집 위에 있고 고기는 못 가운데 있으면서 서로 즐거워하며 서로를 잊고 지냅니다. 하루아침에 물고기가 튀어나와 사람을 먹으려 하면 사람은 반드시 깜짝 놀라며 만고에 없던 변괴로 생각하겠지요. 이제 사람이 물고기를 먹는 것은 변괴로 여기지 않고 이치에 마땅한 바로 생각하니 어찌된 셈일까요?’ 이 말이 비록 우스갯소리지만 크게 이치가 있다 하겠다.” 홍길주,『수여연필』(홍길주 지음, 정민‧강민경‧박동욱 외 옮김,《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 - 홍길주의 수여방필 4부작》, 돌베개, 2006. 인용)

그리고 다음해(1836년) 여름 홍길주는 다시 7일 동안 생각이 나는 대로 적은 137항목의 글을 묶어 ‘수여난필(睡餘瀾筆)’이라 제목을 붙였다. 그렇게 ‘물결 난(瀾)’자를 취해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 홍길주는 앞서 쓴 ‘수여방필’과 ‘수여연필’이 넘쳐 물결이 뒤집히는 듯 하다는 말이라고 해명했다.

“문자는 두루 채색을 갖추고 있다. 붓에 먹물을 적셔 종이 위에 나타내면 종이는 희고 먹은 검어 두 빛깔일 뿐이다. 종이에 펼쳐진 좋은 글을 보면 오색이 눈부신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한번은 ‘글자에는 청황적백 등의 여러 빛깔이 있다’라고 말했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이가 드물었다.

하는 일마다 옳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다른 좋지 않은 일은 모두 눈감아버리면서 오직 자기가 평생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되풀이해 말한다. 또 사사로운 원한이 있으면 종종 그 자리에서 짓밟아버린다. 진실로 이러한 잘못이 없다면 ‘가인(可人), 즉 괜찮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이것을 태초에게 말하니 태초가 한동안 멍해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점에서 부끄럽다.’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먹는 죽과 밥은 모두 백성들의 기름과 피다. 부귀한 집안에서 쓰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베옷 입은 빈한한 선비가 기름을 사고 땔감을 사는 몇 닢의 돈도 모두 아무 고을 아무 마을의 백성이 살을 깎고 골수를 뽑아서 이웃과 친족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그 다음 날 구렁에 나뒹굴게 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서울 사람은 비록 굶어 죽은 자라 해도 타고난 제 수명을 다 마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처음에 무겁게 보이면 평범하게 행동해도 사람들은 무겁게 본다. 처음에 모욕을 당하면 살펴줄 만한 일도 사람들은 모욕한다. 처음에 사랑을 받으면 잘못된 일을 해도 사람들은 사랑하고 처음에 미움을 받으면 예쁜 짓을 해도 사람들이 미워한다. 그럴진대 사람이 그 처음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홍길주,『수여난필』(홍길주 지음, 정민‧강민경‧박동욱 외 옮김,《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 - 홍길주의 수여방필 4부작》, 돌베개, 2006. 인용)

앞의 삼필(三筆)은 홍길주가 생전에 모두 제목을 붙였다. ‘수여난필’을 묶어 낸 이후에도 홍길주는 듣고 보고 생각하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틈나는 대로 종이에 적어두었다. 그러나 1841년(헌종 7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미쳐 책으로 엮어 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보자기에 싸여 상자에 담겨 있던 것을 1842년 봄 아들 홍우건이 꺼내 보니 1837년에 쓴 45항목, 1838년에 쓴 39항목, 1839년에 쓴 56항목, 1840년에 쓴 7항목, 1841년에 쓴 22항목의 글들이 있었다. 이에 홍우건은 서둘러 베껴 써 2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감히 따로 제목을 붙이지 못하고 홍길주의 마지막 수필집이자 수상록인 ‘수여난필’에 연이어 낸다는 뜻으로 ‘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이라고 이름 하였다.

“전에 깨달음이 사람을 자주 그르치는 것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몸을 세우고 행실을 닦으며 도를 배워 문장을 한다고 해도 모두 반드시 깨달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말한다. ‘깨달음이 적은 자는 진실로 남을 그르치는 법이다. 이 주장은 누구든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다만 염려되기는 이 사람이 원래 깨달음이란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모를까 하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 못 가 그 사람은 때와 어그러져 움직였다 하면 비방과 헐뜯음을 입게 된다. 하지만 그 실정을 살펴보면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속에 한 개의 깨달음이라는 글자가 적은 것이 빌미가 되었을 뿐이다.

송나라 장자야(張子野)가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수생(水生)에게 말했다. ‘무엇을 반찬으로 삼을 만한가?’ 수생이 말했다. ‘오직 배고픔만이 반찬이 될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도 중이 연포탕을 끓이는데 한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므로, 그게 뭐냐고 하자 ‘시장기’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갑에서 돌려서 깨우쳐주었으나 갑이 이를 깨닫지 못했다. 을이 곁에 있다가 이를 듣고 바로 갑을 위해 한 말인 것을 알았다. 을은 과연 갑보다 나은 것일까? 다른 날 을에게 돌려서 깨우쳐주었으나 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갑이 곁에 있다가 이를 듣고 바로 을을 위해 한 말인 것을 알아차렸다. 갑이 과연 을보다 나은 것일까? 자신에게는 어둡고 남에게는 밝은 것은 온 세상이 모두 그렇다. 나는 누가 낫고 누가 못한지 분간하지 못하겠다.” 홍길주, 『수여난필속』(홍길주 지음, 정민‧강민경‧박동욱 외 옮김,《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 - 홍길주의 수여방필 4부작》, 돌베개, 200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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