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② 수도 한양은 국가 전략과 기획의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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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② 수도 한양은 국가 전략과 기획의 집합체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5.1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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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⑩

▲ 도성전도(청구요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헤드라인뉴스=한정주 역사평론가] ‘신권정치’와 함께 정도전이 유교 국가의 이념과 철학을 철저하게 구현해 건설한 도시가 수도 ‘한양(漢陽)’이었다.

이때 정도전은 유학을 대표하는 십삼경(十三經) 중의 하나인 『주례(周禮)』의 원리인 ‘좌묘우사 면조후시(左廟右社 面朝後市)’에 따라 궁궐과 종묘, 사직단, 관청, 시장 등 주요한 공간의 자리를 잡았다.

즉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왼쪽인 지금의 종로4가 자리에 선왕(先王)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오른쪽인 인왕산 아래 자락에는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했다.

그리고 육조(六曹) 등 조정의 주요 관청들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좌우에 배열해 세우고, 다시 종로에 저잣거리(시장)를 조성하도록 했다.

또한 정도전은 경복궁은 물론이고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융문루 등 궁궐의 주요 건물 하나하나에 유교적 이념과 이상을 새겨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어 경복궁이란 이름은 유학의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대아(大雅)」편의 ‘기취(旣醉 : 이미 술에 취하다)’라는 시의 구절 중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곧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에서 뜻을 취하고 글자를 따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그는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원리와 질서를 담아 한양도성을 축성하고 4대문(四大門)과 4소문(四小門)을 설치했으며 유학의 기본 이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한양도성을 지키는 사대문(四大門)의 명칭을 지었다.

그래서 ‘인(仁)을 일으킨다’는 철학을 담아 동쪽 대문의 이름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고, ‘예(禮)를 높인다’는 이념을 담아 남쪽 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선의 수도 한양이 정도전의 국가 전략과 기획의 집합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그가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의 뜻을 꺾고 기어코 북악(北岳) 아래에 정궁(正宮)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학대사는 한양의 지세(地勢)를 볼 때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왕산 아래 지금의 필운동 일대에 정궁(正宮)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일찍이 무학대사의 예언과 자문에 따라 조선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성계는 이 의견에 따르려고 했지만 정도전이 나서서 반대했다.

이때 그가 들고 나온 이유 역시 유학의 이념과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 즉 제왕(帝王)은 남면(南面)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法道)인데,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게 되면 임금이 거처할 정궁을 남향(南向)으로 앉힐 수 없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정궁을 어느 곳에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양도성 건설 계획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정궁의 위치에 따라 궁궐의 전각, 관청, 종묘, 사직단, 시장, 대문과 소문 등 도성 안의 모든 설계와 건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대로 정도전의 승리였다. 이성계의 스승인 신승(神僧) 무학대사의 의견을 한방에 제압해버릴 만큼 정도전의 힘과 영향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이렇듯 ‘이성계를 이용해 자신이 조선을 세웠다’는 정도전의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도전은 그토록 막강했던 힘과 영향력 때문에 ‘왕권주의자’로 신권정치를 “신하들이 나라의 권세를 제멋대로 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인 조선에서 400여년 가까이 ‘역적’ 대접을 받았다.

더욱이 조선 중기 이후 권력을 잡은 사림파(士林派)는 정도전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정몽주를 종조(宗祖)로 삼아 자신들의 학통(學統)과 정치적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정도전은 선비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대상 혹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정몽주가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忠臣)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 받을수록 정도전은 자신이 무너뜨린 고려(高麗)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그토록 공들여 세운 조선에서도 충의(忠義)를 저버린 역적으로 잊혀져갔다.

1398년(태조7년) 8월26일 태종 이방원의 칼에 무참하게 도륙당한 후 정확히 393년이 지난 1791년(정조15년)에 국가 차원에서 다시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을 수정 편찬하고 다시 74년이 지난 1865년(고종2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한양도성 설계의 공적을 인정해 시호를 하사해달라고 청하고, 이에 고종이 1870년 마침내 문헌(文獻)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할 때까지 정도전은 역적의 족쇄를 찬 채 육신은 도륙당하고 정신은 짓밟히는 수난을 겪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 시대 내내 비난의 대상이자 논란거리였던 정도전의 삶과 철학 그리고 죽음은 조선이 거의 망해갈 무렵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고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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