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南冥) 조식④…“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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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④…“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4.05.0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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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⑨
▲ 남명 조식의 초상.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 현재 경남 합천군 삼가면)의 토동(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외가에서 줄곧 자라다가 5살 무렵 아버지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한양으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조식이 사망한 1572년까지 그의 삶과 철학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한양에서 거주한 시기(26세 이전)→경남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산 시기(30~45세)→경남 합천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 : 뇌룡정)를 짓고 산 시기(48~61세)→경남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산 시기(61~72세)다.

한양에 올라간 조식은 처음 연화방(蓮花坊 : 현재 서울 종로구 종로4∼5가)에서 살았다. 당시 그는 이윤경(李潤慶)·이준경(李浚慶) 형제와 이웃해 살면서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이준경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로 조정에서 사림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한 고상한 인격의 선비였다.

또한 나이 18세 때 조식의 아버지가 연화방에서 장의동(壯義洞)으로 집을 옮기자 그곳에서는 성우(成遇)·성운(成運) 형제와 벗을 삼아 생활했다. 이들 형제는 율곡 이이와 함께 서인의 종조로 추앙받은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과 사촌지간으로 기호사림에 자양분을 제공한 기사(奇士)요 대학자였다.

조식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기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학문이 높고 인격이 고상한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조식은 이들과 함께 독서하고 학문을 토론했는데, 이때 성리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천문(天文)·지리(地理)·의방(醫方)·수학(數學)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그의 학문적 성향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學)’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6세 되는 1526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조식의 한양 생활 또한 끝을 맺게 된다. 조식은 선영이 있는 삼가현의 관동(冠洞)에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3년 상을 마친 조식은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경남 의령 자굴산 명경대(明鏡臺) 아래 암자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이긍익은 당시 조식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항상 문을 닫아걸고 홀로 단정히 앉아 새벽까지 독서를 했다. 하루 종일 한 가닥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가 때때로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은 소리로 말미암아 아직 독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려실기술』 ‘명종조(明宗朝)의 유일(遺逸)’

그러다가 30세가 되는 1530년 처가가 있는 경남 김해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까닭은 홀로 남은 노모를 봉양하면서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조식의 이러한 뜻은 신어산(神魚山) 아래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식은 이곳에서 더욱 학문에 침잠(沈潛)했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그의 명성은 김해는 물론이고 밀양(密陽)과 단성(丹城 : 현재 경남 산청) 등에까지 미쳤고, 그의 학문과 덕성을 추앙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산해선생(山海先生)’이라고 불렀다. 조식의 또 다른 호인 ‘산해(山海)’는 이때 생겼다. 이 호는 “태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르겠다”는 조식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조식의 뜻과 의지는 산해정 안의 방에 걸어놓은 ‘좌우명(座右銘)’을 통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진실되고 삼가며 /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며 / 태산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고 / 빛나는 봄날처럼 아름다울 지어다.” 『남명집』 ‘좌우명’

▲ 경남 김해시의 산해정(山海亭)’. 조식은 이곳에서 학문에 침잠(沈潛)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김해 산해정을 중심으로 한 조식의 삶과 학문은 나이 45세가 되는 1545년 노모가 사망하면서 마무리된다. 삼가현의 선영에 어머니를 모신 조식은 3년 상을 마친 1548년 마침내 김해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그곳을 강학의 공간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계부당은 글자 뜻 그대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함양(涵養)하는데 힘쓰고 제자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뇌룡사에는 비록 산림(山林)에 묻혀 산 이름 없는 처사(處士)일지라도 마땅히 용과 우레의 기상을 품고 살겠다는 조식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조식은 ‘뇌룡사’라는 이름을 지을 때 ‘남명’을 호로 삼았던 때처럼 다시 『장자』에서 그 뜻을 취했다. 성리학자였지만 결코 성리학에 갇혀 지내지 않았던 조식의 우뚝한 기상과 당당한 기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군자가 어쩔 수 없이 천하를 다스린다면 무위(無爲)만한 것이 없다. 무위한 다음에야 본래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편안히 머물 수 있다. 그러므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의 몸을 보전하는 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라야 세상을 의탁할 수 있고, 자기의 몸을 보전하는 일을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자라야 세상을 맡길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가 만약 그 오장(五臟)을 흩뜨리지 않고 그 총명함을 겉에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면 시동처럼 가만히 있어도 용(龍)의 기상이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雷) 소리가 나며 정신이 움직이면 자연이 따르고 자연 그대로 무위로 있어도 만물은 먼지가 흩날리는 것처럼 움직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내게 어디 있겠는가!” 『장자』 ‘재유(在宥)’편

조식은 이 가운데 ‘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시거이용현 연묵이뇌성)’, 즉 ‘시동처럼 가만히 있지만 용의 기상이 드러나고 깊은 연못처럼 잠잠하지만 우레 소리가 난다’는 구절에서 ‘용(龍)’자와 ‘뇌(雷)’자를 따와 뇌룡사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 『장자』 ‘재유(在宥)’편에서 이름을 따온 뇌룡사(雷龍舍). 원래 건물은 전란으로 불타고 훗날 뇌룡정으로 복원됐다.
실제 이곳에 거처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면서부터 조식은 이황을 뛰어넘는 사림(士林)의 태두로 우뚝 솟았다. 그의 당당한 기상과 고상한 인품 그리고 높은 학식에 매료되어 전국의 수많은 사림(士林)들이 그의 문하생(門下生)이 되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이다.

뇌룡사에 거처한 지 3년 만인 1551년 오건(吳健)이 찾아왔고 뒤이어서 정인홍(鄭仁弘)이 합천의 유생들을 이끌고 조식의 제자가 되었으며 김우옹·최영경·정구 등 뛰어난 젊은 학자들이 수도 없이 밀려들었다. 계부당과 뇌룡사에 담은 조식의 뜻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조식은 진정 맹자가 말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인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서 교육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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