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⑤ 박규수 통해 통상개화파로 전해진 경제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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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⑤ 박규수 통해 통상개화파로 전해진 경제사상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6.01 0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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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부국(富國) 전략을 찾다
▲ 박제가와 북학파의 경제사상을 이어받은 박규수(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와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통상개화파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조선의 경제학자들]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부국(富國) 전략을 찾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이 직면하게 될 미래 사회의 흐름을 읽는 박제가의 통찰력은 ‘해외 통상론’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박제가는 자원이 부족하고 백성이 가난한 조선은 “전답을 경작하고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며 상인들에게 장사를 허용하고 장인들에게는 일정한 혜택”을 주는 등 나라 안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라와 백성이 풍요롭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조선에서 만든 생산품을 거래하는 해외 통상(通商)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외국과 통상하지 않아 생겨난 조선사회의 폐단을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거의 499년이 지났는데 여태껏 다른 나라와는 배 한 척 왕래한 적이 없다. 이에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을 보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원래 본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해 보고들은 것이 적다보니 의심이 많아서 생겨난 일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두려워하고 의심을 잘한다. 풍속과 기상이 우둔하고, 재주와 식견이 확 트이지 못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오로지 다른 나라와의 통상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풍속이다.”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서

다른 나라와 통상하지 않아 백성들은 매우 폐쇄적인 성향을 갖게 됐고 견문과 지식은 물론 상업 활동과 물품 제조 기술이 더욱 쇠퇴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럼 해외 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일까? 박제가는 다른 나라와 통상해 얻는 이득은 비단 경제적 부유함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해외 통상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개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가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풍속을 물어 나라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고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또한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은 세상을 개화하기 위한 밑바탕이 될 것이므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서

만약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고 해외 통상을 추진했을 때 얻는 이로움을 간파한 박제가의 통찰력이 받아들여졌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몇 십 년을 앞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우리나라는 20세기를 식민의 역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역사로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한 조선의 19세기는 박제가가 꿈꾼 개혁과 부국강병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아 가버렸다.

서인(노론) 세력의 반발과 저항 속에서도 개혁정치를 편 정조는 1800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자신과 같은 서얼 출신 등을 중용해 정치적·학문적으로 후원해준 정조의 죽음은 곧 박제가에게는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다시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개혁 관료들을 하나둘씩 조정에서 제거해나갔다. 박제가 또한 사돈인 윤가기의 ‘동남 성문 밖 흉서 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를 뒤집어 쓴 채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4년이 지난 1805년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났지만 개혁과 부국강병에 대한 불타는 열정은 이미 물거품이 돼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때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남긴 한 편의 시는 수십 년 후에 닥칠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예견한 듯하다.

“선왕(정조)의 뜻은 낡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데 있었네.
악의 뿌리를 씻어내고 나라의 기강을 회복하고자 하셨네.
선왕의 향기가 중도에서 끊겨 버렸으니
수척하고 나약해진 나라의 운명을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울까.
나를 부르실 때마다 왕안석에 비유하셨는데
선왕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네.”

그런데 박제가와 그의 동료인 북학파 그룹이 꿈꾼 조선의 개혁과 부국강병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박제가와 북학파의 경제사상을 이어받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문호개방을 통해 조선의 자주적인 개화와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규수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천주교 박해를 중단하는 한편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내세운 자신의 요청이 흥선대원군에게 번번이 거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젊고 유능한 개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박규수 문하에 모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 등이다. 이들은 박규수로부터 북학파의 사상에서 중국에 대한 견문과 지식 그리고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은 물론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훗날 통상개화파의 핵심 인사가 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박제가의 경제사상과 부국강병책은 박규수를 통해 통상개화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이들 젊은 개혁 그룹은 전날 박제가와 북학파가 젊음을 불살랐던 열정 그대로 조선의 자주적인 개화와 근대화를 위해 자신들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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