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②세계관의 대혁명을 가져온 청나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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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②세계관의 대혁명을 가져온 청나라 여행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5.11 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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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부국(富國) 전략을 찾다
▲ 1790년 조선 사행이 청나라에 들어서는 모습을 담은 ‘연행도 조양문’.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조선의 경제학자들]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부국(富國) 전략을 찾다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그룹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경세지학이 박제가에게 사상의 큰 물줄기 역할을 했다면 청나라 여행은 그의 세계관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고 할 수 있다.

1778년(정조 2년) 3월 박제가는 29살의 나이에 이덕무와 함께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신 길에 나섰다. 당시 박제가와 이덕무의 청나라 행은 홍대용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소 박지원을 둘러싸고 있는 젊은 학자 특히 서얼 출신 학자들의 탁월한 능력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홍대용은 넓은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려는 목적으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이때를 시작으로 박제가는 1801년까지 모두 4차례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런데 처음 청나라에 들어선 박제가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훗날 『북학의』을 저술하면서 그는 당시 청나라에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밝혔다.

“수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평소에 듣지 못한 기이한 사실들을 새롭게 들었고, 중국의 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옛 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박제가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와 물질적 풍요를 보고 조선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는 길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청나라를 배우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가난과 검소함’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해치는 큰 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조선으로 돌아가면 추진해 볼 목적으로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만한 풍속이나 문물·제도를 발견하는 대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하게 기록해두었다. 이 기록들은 훗날 『북학의』를 저술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됐다.

청나라에서 세계관의 거대한 폭풍을 경험한 박제가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청나라가 미개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허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박제가가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와 물질적 풍요에 대해 얘기해도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단 한 글자로 묵살해버릴 뿐이었다. 심지어 박제가를 나무라고 비방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가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야심차게 구상한 청나라를 배워 조선의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체제개혁과 부국강병 전략은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거대한 이념(?)의 장벽에 막혀 도대체 먹혀들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은 그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사실을 말해도 오랑캐를 미화한다거나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오로지 성리학의 가르침에 갇혀 산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편협함과 고루함이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박제가의 학문적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박지원은 훗날 『북학의』에 남긴 자신의 글에서 이렇듯 실정에 어두우면서도 세상의 모든 정보와 이치를 아는 양 거만을 떠는 지식인들의 허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 한 모퉁이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닌 채 살고 있다. 발로는 청나라 땅을 단 한 차례도 밟아보지 못했고, 눈으로는 청나라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조선 땅을 벗어나 본 적도 없다. 긴 다리의 학과 검은 깃털을 가진 까마귀가 제각각 자신이 타고난 직분을 지키며 사는 꼴이고, 우물 안 개구리와 작은 나뭇가지 위의 뱁새가 자신이 사는 곳이 최고라고 자랑하며 사는 꼴이다.” 『북학의』 ‘박지원의 서문’ 중에서

이러한 답답한 현실 앞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 변호하고 청나라에서 직접 보고 온 사실을 널리 알리는 한편 조선이 ‘가난과 무지’로부터 벗어나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상과 경제발전 전략을 취해야 하는 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저술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바로 북학파의 바이블이자 중상주의 경제사상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책 『북학의(北學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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