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①“법·제도 좋다면 오랑캐라도 스승으로 섬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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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브레인 박제가…①“법·제도 좋다면 오랑캐라도 스승으로 섬겨야”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5.04 0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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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부국(富國) 전략을 찾다
▲ 박제가 초상화. <추사박물관 소장>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실학자들의 경제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가 토지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펼친 ‘중농주의 학파’라면 다른 하나는 상공업 발전 전략을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전개한 ‘중상주의 학파’다.

중농주의 학파의 경제사상가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을 들 수 있고 중상주의 학파의 경제사상가로는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를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정약용이 중농주의를 대표하는 경제사상가라고 한다면 박제가는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경제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중농주의 학파와 중상주의 학파의 경제이론은 이 두 사람에 이르러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와 박제가의 저서 『북학의』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의 경제발전과 부국(富國) 전략을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찾은 중상주의 경제사상가들은 대부분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다.

‘북학(北學)’이라는 개념은 박제가가 최초로 사용한 이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실학자 그룹을 부르는 고유명사가 됐다. 이들은 매우 뚜렷한 목표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 지배 계층인 성리학자들이 오랑캐라고 배척한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 및 경제 시스템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 부강(富强)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북학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은 이를 두고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다면 오랑캐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고 표현했다.

박제가의 삶과 학문적 궤적을 추적하다 보면 그의 경제사상의 큰 물줄기가 젊은 시절부터 이들 북학파 그룹과 교유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18세 때 자신보다 13살이나 연상인 박지원을 처음 찾아가 밤을 새며 담화를 나눈 감회를 기록한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라는 글을 보면 이 그룹의 학자들이 백탑(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근처에 모여 살면서 매일같이 만나 문장을 지어 돌려 읽고 또 학문과 사회 현실을 토론한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이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항상 며칠씩 함께 숙박하면서 과거 역사와 국가의 흥망사에서부터 농공(農工)의 이익과 폐단, 산업과 경제, 산천과 국방, 천문과 관상, 음악, 육서와 산수는 물론 심지어 초목과 새, 짐승에 이르기까지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처럼 이 그룹의 학자들과 더불어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수많은 서적을 읽고 토론하면서 박제가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실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경세지학(經世之學)의 줄기를 이루어갔다.

당시 그룹의 모임에는 1737년생인 박지원을 좌장(座長)으로 1741년생인 이덕무, 1749년생인 유득공, 1750년생인 박제가, 1754년생인 이서구 등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대부분 오늘날까지 18세기 문예부흥과 실학운동을 대표할만한 대학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은 훗날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등용할 때 수위(首位)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것은 이 그룹의 출중한 학문과 식견을 증명해 보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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