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것은 내 복이요, 쓰고 매운 것은 나의 분수다”
상태바
“단 것은 내 복이요, 쓰고 매운 것은 나의 분수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4.15 07: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⑧
▲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중 ‘새참(점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⑧

[한정주=역사평론가] 사람의 입맛과 세상 살아가는 맛을 비교·비유하면서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온갖 맛이 갖추어져 있고 또한 그 맛을 느끼고 좋아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한 유희의 ‘맛을 해석한다’는 뜻의 ‘석미(釋味)’라는 글 역시 차이와 다양성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한 편의 우언(寓言)이다.

“우리 집에 손님들이 모여 세상 살아가는 맛을 두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어떤 분이 그 맛이 쓰다고 말하자 어떤 분은 맵다고 말하고 어떤 분은 덤덤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맛이 달다고 한 분은 거의 없었다.

세상 사는 맛은 하나이지만 그 맛을 보고 제각기 자기 입맛대로 품평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사람의 입맛은 하나이지만 세상맛은 다양하여 사람마다 제각기 한 가지 맛만을 느낄까? 어느 것이 옳은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오이는 지극히 작은 채소이다. 하지만 그 꼭지를 씹어 먹은 사람은 입맛이 쓰고, 그 배꼽 부분을 먹은 사람은 맛이 달다. 게다가 인간 세상은 크고 넓으니 어떤 맛인들 갖추지 않았겠는가? 다만 이 가엾은 백성들의 삶은 한 가지 일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사느라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입을 다른 데로 옮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소고기의 맛이 서쪽 나라의 약보다 달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노자는 ‘다섯 가지 맛(五味)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간 세상은 크고 넓어 갖추어지지 않은 맛이 없다고 할진대 세상맛을 본 사람 가운데 입맛이 상한 자가 많으리라. 따라서 인간 만사를 아무리 두루 맛보도록 한다 해도 진정한 맛을 알 수는 없다.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미음이 맛이 쓰고 똥물은 맛이 단 것과 같아서 합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세상맛이 쓴 것은 제 입맛이 쓴 것이요, 세상맛이 단 것은 제 입맛이 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풀뿌리를 씹어 먹을 처지만 된다면야 고기 맛을 달갑게 잊을 수도 있다. 하는 일마다 마음에 들어야 세상 사는 맛이 달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아서 씀바귀도 쓰지만 오히려 냉이처럼 편안히 즐기는 자도 있다. 그러나 황벽나무 껍질의 경우에는 아무리 참을성이 있는 자라도 끝내 맛이 달다고 말하지 못한다.

성인의 큰 도량으로도 ‘환난(患難)이 닥친 상황이라면 환난 속에서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질병을 즐기고 평안함을 싫어하여 일반 사람의 호오(好惡)와는 반대로 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쓴맛 매운맛을 꼭 없앨 것은 아니고 단맛만을 꼭 얻을 것은 아니다. 쓴맛 매운맛 그리고 단맛은 제각각 적절한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칼날에 바른 꿀은 반드시 내 혀를 상하게 하는 법이다. 따라서 단단하다고 뱉고 부드럽다고 삼키는 짓이 자잘한 사람의 행동인 것처럼 쓰다고 먹고 달다고 사양하는 짓 역시 중도(中道)를 걷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다.

하늘이 만물을 만들 때 사물마다 적절하게 사용할 도구를 주었다. 발굽을 가진 동물은 풀을 뜯어 먹게 했고, 어금니가 튼튼한 동물은 날것을 씹어 먹게 했다. 말똥구리는 똥을 삼키고, 날다람쥐는 불을 먹는다. 야갈(野葛)은 독성이 몹시 심해 사람의 입에 들어가면 반드시 넘어뜨려 죽이지만 범이 먹으면 백 일 동안 허기를 느끼지 않게 한다. 솔개는 썩은 쥐가 꿩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매와 더불어 사냥 솜씨를 겨루지 못한다.

무릇 사물이 얻는 모든 것은 운명이므로 거부할 수가 없다. 내가 맛이 단 것을 반드시 취하고자 할 때 맛이 쓰고 매운 것은 그 누구에게 버리겠는가?

단 것은 내 복이요, 쓰고 매운 것은 나의 분수이다. 분수를 넘어서고 운명을 어긴다면 큰 손해를 불러들이지 않을 자가 거의 없다. 오로지 군자라야 조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 맛을 잘 아는 자는 드물다’고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유희,『문통(文通)』, ‘석미(釋味)’ (안대회 지음,《부족해도 넉넉하다》, 김영사, 2009. 인용)

만약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의 미학’을 수용하게 되면 모든 글은 제각기 나름의 가치와 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문장이 어떤 문장보다 좋다거나 어떤 글이 어떤 글보다 훌륭하다는 점수 매기기나 등급 세우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이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진실하게 담고 있는 글이라면 고하(高下)도 없고 우열(優劣)도 없고 시비(是非)도 없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단지 나는 나만의 글이 있고, 김모(金某)는 김모 만의 글이 있고, 이모(李某)는 이모 만의 글이 있고, 박모(朴某)는 박모 만의 글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이덕무는 만약 다른 사람의 글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이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자신의 문장을 갖는 것만 못하며, 자신만의 글을 짓는 사람은 비록 세상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문장가의 글을 모방하는 재주는 없지만 천연의 참다움을 얻은 문장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글이 제각각 다른 것은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 닮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한 다음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글을 쓴다면 그 글은 판각으로 찍어낼 수 있는 수십 수백 장의 그림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질타한다.

“만일 남의 의견을 흉내 내고 본뜨는 법이 삼매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문장을 갖는 것만 같지 못하며, 자신의 문장을 가진 이는 비록 우맹(優孟)이 손숙오(孫叔敖)를 모방하던 일과 같이 다른 작가의 글을 모방하는 재주는 없어도 자신다운 그 글은 천연의 참다움이 많고 인위적인 꾸밈이 적답니다.

그대와 같은 이는 인위적인 것은 많고 천연적인 것이 적을 수밖에 없지요. 문장은 하나의 조화인데 조화를 어찌 얽어매어 흉내내고 본뜰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제각기 한 가지씩 틀을 갖추고 가슴 속에 글을 가득 품고 있어, 그 각각의 얼굴이 서로 닮지 않은 것과 같으니 만일 작품이 한결같게 되기를 강요한다면, 그 글은 판각으로 찍어낸 그림이나 과거 응시자의 답안지와 다를 바가 없어서 무슨 기이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덕무,『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1’ (이덕무 지음, 신호열 외 옮김,《(국역) 청장관전서》, 한국고전번역원, 1978. 인용)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