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②개인적 불행에도 놓지 못한 끈 ‘실용·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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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②개인적 불행에도 놓지 못한 끈 ‘실용·실사’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4.06 0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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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사회 양극화·지역 불균형 해법 제시
▲ 성호 이익의 초상. 『택리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중환의 경제 분야에 관한 서술은 이익이 집필한 백과전서인 『성호사설』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사회 양극화·지역 불균형 해법 제시

[한정주=역사평론가] 이중환은 남인 명문가인 여주 이씨 출신으로 실학파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과 한 집안 사람이다. 이익은 이중환보다 9살 정도 연상이었는데 친족 관계상 이중환은 이익의 재종손(再從孫)이다.

이익과 이중환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익은 일찍부터 이중환을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글씨와 시문은 물론 여러 학문에 두루 밝은 박학다식한 인물로 보았다. 이중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은 이익의 학문 세계를 통해 실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익의 영향력은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하는 과정에서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특히 『택리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중환의 경제 분야에 관한 서술은 이익이 집필한 백과전서인 『성호사설』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현재 전해오는 『택리지』의 일부 필사본 중에는 끝 부분에 『성호사설』의 내용 일부가 부록 형식으로 실려 있기도 한다.

따라서 이중환이 『택리지』를 저술한 배경에는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 온 이익의 학문 세계, 즉 실학의 학풍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중환이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찾아다니며 저술했다는 『택리지』는 실학자로서의 삶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불행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탄생한 책이다.

이중환은 나이 24세 때인 1713년(숙종 39년)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관직에 나간 시기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남인·소론·노론 간 당파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였다.

그런데 경종을 거쳐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전 경종시대에 있었던 ‘목호룡의 고변서’가 발단이 된 역모사건이 일어난다. ‘목호룡의 고변서’는 경종 살해 음모가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소론이 노론을 정치적으로 박해한 사건이었다.

영조가 즉위한 직후 노론은 고변서가 당시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까지 모함했다는 대역무도죄를 물어 목호룡을 처형했다. 평소 목호룡과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했던 이중환 역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1726년(영조 2년) 외딴 섬으로 유배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이중환이 유배지에서 벗어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이중환은 그후 정치적 재기의 길을 찾지 못한 채 자기 한 몸 의지할 곳을 찾아 전국을 방랑하고 다녀야 했다. 이중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택리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아아!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은 이조차도 그렇지 못하다. … 조정에서는 항상 산림 깊숙한 곳에서 도적이 슬그머니 나오지 않을까 의심한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려고 하면 칼·톱·솥·가마 등으로 정적을 서로 죽이려는 당쟁이 혼란스럽게 그치지 않고, 초야에 물러나 살려고 하면 푸른 산과 천 겹 푸른 물이 있지만 쉽게 가지도 못한다.

… 세상에서 한 번 사대부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농·공·상인이 되면 안전해지고 이름을 세울 수 있을까. 아니다. … 그러므로 동쪽에서도 살 수 없고, 서쪽에서도 살 수 없으며, 남쪽에서도 살 수 없고, 북쪽에서도 또한 살 수 없게 되었다.

… 이렇다면 사대부도 없고 농·공·상인도 없으며, 또한 살 수 있을 만한 곳도 없을 것이므로, 이를 두고 땅이 아닌 땅이라고 한다. 이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기록한 것이다. 『택리지』 총론

정치적 패배자였지만 명문 사대부가의 후손으로서 그 명맥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살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던 이중환이 개인적인 불행 속에서도 끝내 놓지 못한 끈은 바로 ‘실용과 실사’의 학문적 태도였다.

이에 그는 30여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을 총정리해 8도의 지리적 조건 및 환경과 사회·경제의 상호연관성을 분석했던 것이다.

훗날 육당 최남선이 남긴 『택리지』에 대한 평가는 불행 속에서도 실학의 꽃을 활짝 피운 대학자에 대한 합당한 찬사라고 할 만하다.

“(『택리지』) 우리나라 지리서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또한 인문지리학의 최초 발명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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