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목마르지 않은 그대가 물의 맛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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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목마르지 않은 그대가 물의 맛을 알겠는가”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3.18 0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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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④
▲ 김홍도,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 연도미상.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④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제가 또한 자신의 문장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론(詩學論)’에서 문장의 길이란 여러 시대와 여러 사람의 ‘차이’와 ‘다양성’을 배우고 익혀서 마음의 지혜를 열고 견문을 넓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배운 시대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고 배운 사람에 관계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두보(杜甫)를 배운 사람을 가장 낮게 보는 것도 잘못이고 혹은 두보만 있는 줄 알고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는 것도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시는 송(宋)·금(金)·원(元)·명(明)을 배운 자를 으뜸으로 여기고 당시(唐詩)를 배운 자가 그 다음이며, 두보(杜甫)를 배운 자가 가장 아랫길이 된다.

배운 바가 높을수록 그 재주가 더욱 더 낮아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두보를 배운 자는 두보가 있는 줄만 알 뿐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먼저 무시해 버린다. 그런 까닭에 재주가 점점 졸렬해진다.

당시를 배운 폐단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것은 두보 외에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 등 수십 명의 작가 이름을 가슴속에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더 나아지려 하지 않아도 절로 나아진다.

송·금·원·명을 배운 사람은 그 식견이 또 이들보다 낫다. 그러니 하물며 여러 종류의 책을 폭넓게 섭렵하여 성정의 참됨을 드러낸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로 볼진대 문장의 도는 그 마음의 지혜를 열고 견문을 넓히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지 배운 시대에 관계된 것은 아니다.

글씨만 해도 그렇다. 진인(晉人)을 배운 자가 가장 아랫길이 되고 당송 이후의 법첩을 배운 자가 조금 볼만하며 곧장 당대 중국의 글씨를 익힌 자가 가장 낫다. 어찌 진인과 당송의 글씨가 지금의 중국 글씨에 미치지 못해서이겠는가?

시대가 멀면 베껴 판각한 것조차 전해지지 않고 외국에서 태어나면 작품의 품평이 정확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도리어 지금 중국 사람의 글씨가 믿을 만하고 가까이하기 쉬운 것만 못하다.

옛 글씨의 법도 오히려 이것을 통해 구할 수가 있다. 대저 탑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의 여부나 육서(六書)와 금석문의 근원, 필묵의 변화 유동하는 자연스런 체세(體勢)는 모르면서 되잖게 스스로 진인(晉人)이라 하고 이왕(二王: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이라 여긴다.

이는 천하의 시를 다 폐하고서 두보의 수십 편 자구만 붙들고서 스스로를 고루한 틀 속에 빠뜨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대저 군자의 입언(立言)은 때를 아는 것을 귀하게 친다. 내가 만일 중국에 산다면 이 같은 논의를 일삼을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장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두보의 시나 진인의 글씨는 사람에게 견주면 성인과 같다. 성인을 버리고서 성인만 못한 자를 배우라는 말이냐?’

나는 말한다. ‘인의를 행하는 일과 시 짓고 글씨를 쓰는 예술은 경우가 다르다. 그렇다고는 해도 땅을 구획하여 집을 짓고는 ‘이것이 공자의 거처다’라고 하고는 죽을 때까지 눈을 꽉 감고서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또한 쓸모없게 될 뿐이다. 문장에 있어 고금의 오르내림의 얼개와 풍요(風謠)에 있어 명물(名物)의 같고 다름의 득실 같은 것은 정밀한 자가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어서 사람 사람에게 다 설명하기가 어렵다.’

지금 임금 5년 신축년(1781) 10월에 위항도인(葦杭道人)은 겸사(兼司)에서 숙직 서는 중에 쓴다.” 박제가,『정유각집』, ‘시학론(詩學論)’ (박제가 지음, 정민‧이승수‧박수밀 옮김,『정유각집 하(下)』, 돌베개, 2010. 인용)

더욱이 박제가는 ‘『시선(詩選)』서문’이라는 글에서는 ‘음식의 다양한 맛’에 비유하여 신맛,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등 모든 맛을 본 사람만이 맛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시와 문장에 대해 말하는 사람 역시 한 가지만을 획일적으로 고집해서는 안 되고 모든 시와 문장이 갖고 있는 나름의 묘미를 알아야 비로소 작품을 잘 가려 뽑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작품을 뽑는 방법은 온갖 맛을 모두 살리되 한 가지 색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데 그 요체가 있다. 그렇다면 ‘뽑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택을 하되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만드는 것은 뽑아서 다시 뒤섞는 것에 불과하므로 애초부터 뽑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맛이란 무엇인가? 저 구름과 노을, 비단과 자수를 보지 못했는가?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순식간에 마음과 눈이 함께 거기로 옮아가서 잠깐 사이에도 변화가 무쌍하다. 그 모양을 대충 보아 넘기면 그 실상을 이해할 수 없지만 꼼꼼하게 음미하면 그 맛은 무궁하다.

무릇 사물이 변화하여 마음을 움직이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 그 모두가 맛이다. 입이 관할하고 있는 것만이 맛은 아니다.

그런데 시를 뽑는 자리에서 굳이 맛을 기준으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짜고 시고 달고 쓰고 매운 이 다섯 가지 맛은 혀가 느껴서 얼굴에 표현된다. 맛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이와 같지 않으면 그것은 맛이 아니다. 맛을 느낄 수 없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를 뽑는 방법이 저 맛을 느끼는 것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온갖 맛을 모두 함께 살려야 한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선택을 하되 획일적이지 않도록 하고, 또 많은 맛 중에서 각각 하나씩을 뽑아 올리라는 말이다.

신맛은 알면서 단맛은 모른다면 맛을 아는 자가 아니다. 단맛과 신맛을 저울로 달아서 조절하고, 짠맛과 매운맛을 적당히 짜맞추어 옹색하게 채워 넣는 자는 뽑는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자이다. 신맛이 필요할 때에는 극히 신맛을 택하고, 단맛이 필요할 때에는 극히 단맛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맛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공자께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지마는 그 맛을 잘 아는 자는 드물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성인은 꼼꼼한 마음을 가졌음을 짐작하게 된다. 꼼꼼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입에서 느끼는 맛을 통하여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 것이다.

속인들은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모든 것을 파악하여 날마다 접촉하면서도 그 맛을 분간할 줄 모른다.

누군가 ‘물은 어떤 맛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은 아무런 맛이 없다’ 그러나 목마른 자가 물을 마셔보라! 그러면 천하의 그 어떤 맛난 것도 이보다 더하지 않으리라.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 그러니 저 물의 맛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박제가,『정유각집』, ‘시선 서문(詩選序)’ (박제가 지음, 정민‧이승수‧박수밀 옮김,『정유각집 하(下)』, 돌베개, 2010.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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