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사고·가치관 뒤집은 이덕무와 박제가의 새로운 문풍(文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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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사고·가치관 뒤집은 이덕무와 박제가의 새로운 문풍(文風)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3.04 0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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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②
▲ 단원 김홍도의 ‘오원아집소조’.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②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덕무는 문장가로서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서도 크게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한·중·일 3국의 시 비평 전문서인 『청비록(淸脾錄)』을 저술해 온갖 종류의 한시(漢詩)를 비평하면서 시는 물론 문장을 보는 비평가로서의 안목을 크게 키웠다.

“생각하건대 나는 본시 시를 잘하지 못하면서도 시를 논하기를 좋아하여 한가히 지내는 사이에 이목(耳目)이 미치는 대로 고금(古今)의 시구(詩句)를 손수 기록하여 변증(辨證)·소해(疏解)·품평(品評)·기사(記事)를 붙였다. 비록 두서가 없이 한만하지만 머리맡에 늘 간직해서 남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내 스스로 즐거워하므로『청비록』이라 이름하였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청비록(淸脾錄)’

이러한 이덕무를 두고 유득공은 “예로부터 시를 짓는 사람이 있고 시를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시를 짓는 사람은 민간의 일반 부녀자나 아이들이라도 안 될 것이 없지만 시를 비평하는 사람은 특별히 슬기로워서 시를 알아보는 능력과 안목이 있는 자가 아니면 안된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덕무가 온갖 종류의 한시를 모두 보았다는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역대의 시 가운데 어느 작품이 가장 좋습니까?”라고. 이에 이덕무는 이렇게 대답한다.

“벌이 꿀을 만들 때에는 꽃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 벌이 만약 꽃을 가린다면 꿀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를 짓는 일도 이와 같다. 시를 짓는 사람이 마땅히 여러 사람의 것을 섭렵해서 시를 지어내게 된다면 곧 나의 시는 역대의 체격을 모두 갖추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이 ‘좋은 시는 당나라나 송나라 그리고 원나라나 명나라 시대의 작품이지’라고 하면서 각기 숭상하는 바가 따로 있는 것은 시를 말하는 절대적 논리가 아니다.” 이광규, 『청장관전서』, ‘선고부군유사(先考府君遺事)’

꽃을 가리지 않아야 꿀을 만들 수 있다는 이덕무의 논리는 모든 글에는 벌이 꿀을 취하듯 반드시 취할 것이 있으므로 두루 모든 시를 섭렵하려고 해야지 어떤 시는 숭상하고 어떤 시는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덕무가 박제가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이 20년 전에 백가서(百家書)를 박람하여 풍부하다 하겠으나 궁극적인 뜻은 바로 경사(經史)에 완전함을 기함이요 책을 지어 이론을 세운 것은 경제 실용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스스로를 가만히 어중(漁仲)과 귀여(貴與)의 반열에 붙여 생각하였소. 문장을 짓는데도 우리들은 별도로 위체(僞體)를 만들고 과거의 많은 문인들을 스승으로 삼기를 서로 맹세하였소.

대개 삼백편시(三百篇詩)·소부(騷賦)·고일(古逸)·한·위·육조·당·송·금·원·명·청과 신라와 고려와 조선의 안남(安南)·일본(日本)·유구(琉球)의 시들에 이르기까지 상하 삼천년 동안의 시대와 종일 일 만리 지경에 이르도록 안력이 닿는 곳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섭렵하여 감히 옛 사람들에게 양보할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간혹 그 좋아하는 것을 따라 때때로 그것을 흉내내어 한 번 시험 삼아 짓기도 하면서 거칠 것이 없이 마음대로 하였지요.” 이덕무, 『청장관전서』, ‘박제가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을 통해 이덕무와 박제가 등이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옛 작품부터 당대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을 두루 섭렵해 새로운 문풍을 세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는 옛 작품을 흉내 내어 시험 삼아 문장을 지어보기도 하고 스스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체(僞體)를 별도로 만드는 문학적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실제 유득공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의 문학적 실험과 새로운 글쓰기를 가리켜 당대의 사람들이 ‘검서체(檢書體)’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상투를 틀고부터 무관(懋官: 이덕무), 차수(次修: 박제가)와 조계(曹溪) 백탑(白塔)의 서쪽에서 시를 이야기하였다. 당․송․원․명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마음껏 많은 시인들의 시를 읽고 그 정화(精華)를 뽑아 모으는 데 뜻을 두었을 뿐이었다.

내각(內閣)에 봉직하고부터는 그것도 여가가 나지 않았는데 영편단구(零篇短句)가 어쩌다가 속된 인간들의 눈에 걸리기라도 하면 너무 정치(精緻)하고 지나치게 깨끗하다 의심하여 마침내 ‘검서체’라 지목을 하니 정말로 가소롭다. 검서체가 어찌 특별한 시체(詩體)이겠는가. 안목이 있는 자는 저절로 알 것이다.” 유득공, 『영재집』, ‘검서체(檢書體)’

여기에서 사람들이 ‘검서체’라고 부른 까닭은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유등공 등이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이 설치된 이후 정조가 특별히 발탁한 서얼 출신의 4검서관으로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들은 모든 시대와 나라 그리고 온갖 종류의 시문을 배우고 익히면서 거칠 것이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실험하고 창작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자신만의 문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역대 시문과 온갖 종류의 문장을 통해 ‘차이’와 ‘다양성’을 깨우치고 각각의 글 속에 담겨 있는 이치와 논리를 알아본 다음에 비로소 자신의 문장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한당(漢唐)의 문장만을 숭상했다면 그의 문장은 한당(漢唐)의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송원(宋元)의 문장가만을 본받으려고 했다면 그의 문장은 송원(宋元)의 문장을 흉내 내는 아류(亞流)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덕무는 이러한 문장 공부와 습작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를 본받아 따라 봤자 참 마음만 잃을 뿐 / 나는 지금 사람이기에 또한 지금을 좋아할 뿐이네. / 만송(晩宋)과 만명(晩明) 사이의 별다른 길을 개척했다는 / 난공(蘭公: 반정균)의 한마디 말은 나를 알아본 것이네.”

그러면서 이덕무는 중국와 조선을 중심과 주변의 관계로 보는 전통적인 사고와 가치관을 단숨에 뒤집어버린다. 평등한 시선으로 보는 순간 중국과 조선의 관계는 이제 ‘차이’와 ‘다양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조선 역시 좋은 점 있으니 / 어찌 중국만 모두 좋겠는가 /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있다고 해도 / 모름지기 평등하게 보아야 하네” 이덕무, 『청장관전서』, ‘연경으로 떠나는 박감료와 이장암에게 기증하다(奉贈朴憨寮李莊菴建永之燕 十三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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