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④채제공의 경제사상과 계승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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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④채제공의 경제사상과 계승자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2.2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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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 채제공의 개혁·경제사상은 허목, 유형원, 이익을 잇고 다음 세대인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들에게 물려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사진은 허목(왼쪽부터), 유형원, 이익, 정약용의 초상.

[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한정주=역사평론가] 채제공은 허목, 유형원, 이익을 잇고 다음 세대인 이가환, 정약용에게 남인의 개혁·실학사상을 물려주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보통 실학파의 역사를 뒤져보면 남인 출신들은 ‘중농학파’, 즉 농업 문제(토지 개혁)를 중심으로 사회·경제개혁을 기획하고 구상했다고 나온다. 이 때문인지 역사학자들은 채제공의 사상 역시 상업 문제보다는 농업 문제를 더 중심에 두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남인 출신의 다른 실학자들과 달리 사상과 이념보다는 행정과 정책의 입장에서 경제개혁 문제를 다루었다. 따라서 정치가 혹은 행정 관료로서 채제공의 경제사상을 다루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 시장주의(시장과 상업의 자유화)

17세기 조선이 ‘대동법을 둘러싼 경제 대논쟁의 시대’였다면 18세기 조선은 ‘통공(通功)을 둘러싼 경제 대논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전 상인과 사상인 간의 상업과 시장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컸고 시전 상인의 매점매석 행위로 국가 경제가 왜곡되고 백성들의 삶이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상에 오른 이후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서 채제공은 당연히 ‘상업과 시장 문제’를 경제개혁의 최대 화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 시전 상인들의 시장 독점과 매점매석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행위였고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경제 개혁이었다.

채제공은 신해통공의 주요 목적을 무엇보다도 소상인과 소상품 생산자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시장 참여와 도시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위한 물가안정에서 찾았다. 특히 독점적 상업 특권을 누린 시전 상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소상인이나 소상품 생산자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롭게 상업 활동에 나서고 시장경제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 통공 정책이 실시되었을 때 이에 크게 반발한 시전 상인들이 입궐하는 채제공의 행렬을 가로막고 ‘통공 정책을 폐지하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채제공이 시전 상인들을 향해 한 말은 ‘시장과 상업의 자유화’에 대한 그의 입장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성 안에서 사는 사람과 도성 주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나라의 백성이다. 행상이든 점포를 갖추고 있는 상인이든 또 물품이 많든 적든 장사하는 일은 모두 떳떳하다. 그럼에도 시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자신의 물건을 가지고 매매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내쫓아 도성 안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든다. 참으로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이 사람도 백성이고, 저 사람도 백성인데 어찌 차별을 둘 수 있겠는가!” - 채제공, 『정조실록』 1793년 3월10일

이렇듯 채제공은 조선의 백성이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상업 활동에 나서고 시장경제에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유지해야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자유로운 시장과 상업 활동, 곧 시장주의는 그의 경제사상과 통공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반도고론(反都賈論 : 반독점론)

시장주의자답게 채제공은 상업과 시장을 독점하는 특권 상인을 가장 큰 ‘경제적 해악’으로 보았다. 신해통공을 시행하기 이전 가장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독점 상인은 금난전권을 행사한 한양의 시전 상인이었다.

채제공은 정조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이들 시전 상인이 금난전권을 악용해 생활필수품을 개인 상인들로부터 싼값에 매점한 후 백성들에게 독점 가격을 매겨 큰 이익을 남기려 하기 때문에 물가가 치솟고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요즘에는 무뢰배들까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시전을 조직하고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필수품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말과 배에 실은 물품에서부터 작게는 행상(行商)이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물품까지 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싼값에 강제로 사들입니다. 만약 물품의 주인이 자신들이 부르는 가격에 팔지 않으면 난전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손발을 묶은 다음 관아에 넘겨 버립니다.

따라서 물품의 주인은 밑지더라도 눈물을 흘리며 팔지 않을 수 없고 물품을 싼값에 사들인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가게에서 몇 곱절의 이득을 붙여 백성들에게 팔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물품을 사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사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시전 상인 외에는 달리 물품을 살 곳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3배 혹은 5배까지 이릅니다.

최근 들어서는 그 행위가 더욱 심하여 채소나 옹기까지도 매점매석하는 시전이 생겨나 어느 누구도 사사로이 물품을 판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금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 제사 음식을 사지 못해 제사조차 받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채제공, 『번암집』 ‘시전의 독점 상인을 폐지하기를 청하다’

금난전권이 철폐되면서 이와 같은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특권과 매점매석 행위는 시장에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통공 정책이 실시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전 상인들의 시장 상권을 급속도로 잠식한 이른바 ‘사상도고(私商都賈: 개인 독점 상인)’들이 또 다른 ‘경제적 해악’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강 주변을 무대로 활동한 사상도고인 경강 상인들의 매점매석과 시장 독점 행위가 극심해지자 채제공은 사상도고들의 ‘시장 독점과 매점매석’을 법으로 강력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한다.

채제공은 시전 상인이든 사상인(사상도고)이든 특정 세력의 상업과 시장 독점은 첫째 이익만을 좇는 풍속이 유행해 백성들의 인심이 나빠지고, 둘째 제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 활동이 위축되며, 셋째 독점 상인을 제외한 일반 상인들은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없고, 넷째 상업 활동에 나서는 백성들이 줄어드는 만큼 저자 거리가 번성할 수 없는 폐단을 낳는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채제공은 나라 경제가 발달하고 백성들이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독점 상인들을 엄하게 다스려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채제공의 경제사상과 정책의 핵심에는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시장 참여를 보호해야 한다는 ‘시장주의’와 더불어 특정 상인들에 의한 상업과 시장 장악을 반대해야 한다는 ‘반독점론’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채제공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채제공은 1799년 1월18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1년5개월 후인 1800년 6월22일 정조 또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은 순조를 대신해 권력을 틀어쥔 사람은 수렴청정에 나선 대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동시에 정조 재위 기간 내내 숨죽이며 지낸 노론 벽파 세력들이 권력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의 핵심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복귀한 노론 벽파 세력은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문제를 빌미삼아 정조시대 개혁 세력의 중심을 이룬 남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인다. 이 정치적 대숙청이 바로 신유사옥(신유박해)이다. 당시 수많은 남인의 핵심 인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채제공의 뒤를 이어 남인의 리더로 기대를 모은 이가환(이익의 종손)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고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유배형에 처해졌다. 또한 정약용과 함께 촉망받는 관료였던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 역시 파직과 함께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남인들을 대숙청한 노론 벽파 세력은 그후 정조와 채제공의 개혁을 뒤집는 대반동 정치를 실시한다. 채제공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남인들이 신유박해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유배객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뜻 역시 온전히 전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채제공이 물꼬를 튼 ‘시장과 상업의 자유화’ 정신은 이후 조선의 시장과 상업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면면히 이어졌다. 이 때문에 훗날 정약용은 채제공의 업적을 논하면서 “모든 백성들이 처음에는 (금난전권을 혁파한)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했으나 법을 시행한 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물품과 재화가 모여 하루가 다르게 일상생활품이 넉넉해지자 크게 기뻐했다. 비록 예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조차 채공(蔡公)이 훌륭하다고 했다”고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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