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② 상업·시장의 자유로운 발달 통한 경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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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시장주의자 채제공…② 상업·시장의 자유로운 발달 통한 경제 개혁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2.1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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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 김학수 화백이 그린 조선시대 숭례문 밖 칠패시 모습.

[조선의 경제학자들] 정조 개혁의 총사령관…신해통공과 경제신도시 화성 건설 지휘

[한정주=역사평론가]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상업 및 시장사에 한 획을 긋는 발표문이 한양의 중심가와 4대문에 일제히 내걸렸다.

발표문에는 ‘시전 상인들이 사상인(私商人: 개인 상인)의 상업 활동을 단속, 금지할 수 있도록 허용한 금난전권에 대해 육의전을 제외하고 모두 혁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시전을 설치하고 그곳의 상인들에게 독점적인 상업 특권을 주는 대신 궁중과 관청의 수요품이나 명나라에 보낼 진상품을 조달하도록 했다.

그런데 양대 전란을 전후하여 시장경제의 발달로 시전 상인이 아닌 사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크게 활기를 띠게 되자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으로 조정에 사상인들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허용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대체적으로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획득한 최초 시기는 선조 말년에서 인조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 조정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재정적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정적인 조세 자원이 절실했다. 이 때문에 시전 상인들은 국가 부역을 부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금난전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금난전권을 행사한 시전의 숫자가 점차 불어나 18세기 영·정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시전 상인들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물품을 독점하고 개인의 소소한 상업 활동까지 단속, 금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시전 상인들이 무차별적으로 행사한 금난전권은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폐단을 낳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도시민의 증가로 생겨난 상품 매매 및 유통에 대한 거대한 욕구를 억압해 시장경제의 발전을 억압하는 해악을 가져왔다.

또한 소상품 생산자, 곧 농민과 수공업자의 시장 참여를 가로막고 백성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제약했다. 그리고 상권을 장악한 시전 상인들이 매점매석 행위로 폭리를 취하는 탓에 백성들은 큰 경제적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이렇듯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은 상업 활동의 자유 및 시장경제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민생을 해치는 ‘사회악’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금난전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깊숙하게 결탁했는데 당시 집권 노론 세력의 막대한 정치 자금원은 다름 아닌 이들 시전 상인이었다. 백성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민생을 해치며 얻은 이익을 시전 상인들과 집권 노론 세력이 나누어 먹었던 셈이다.

일찍부터 ‘상업과 시장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채제공은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이 낳은 사회·경제적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상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이 문제를 ‘경제 개혁의 최대 화두’로 삼았다.

채제공이 신해통공을 실시하기 훨씬 이전부터 ‘조선의 상업과 시장 발전’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박제가의 『북학의』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학의』는 박제가가 1778년(정조 2년) 채제공을 수행하고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다녀온 직후 저술한 책이다.

판서 채제공은 “지금 종루의 북쪽 거리는 비좁다고 할 수 있다. 이 거리를 넓혀 상점들을 나란히 정비하고 시장 사람들이 제각각 가게의 이름을 달고 큰 글자로 이렇게 써 붙이도록 한다. ‘본 상점에서는 경상도의 면포를 판매합니다’, ‘본 상점에서는 남원과 평강의 선지(扇紙)를 판매합니다’. 그리고 흥인문에서부터 숭례문까지 시장 제도를 새롭게 바꾼다면 어찌 통쾌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박제가, 『북학의』 내편 ‘시정(市井)’

조선의 상업과 시장 문제에 남다른 포부를 지녔던 채제공은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야말로 상업과 시장의 발달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라고 여겼다.

그는 “요즘처럼 물가가 치솟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그 폐단의 원인을 따져 보면 시전 상인들이 자유로이 상업 활동을 하는 난전(亂廛: 개인 상인)을 너무 심하게 단속, 금지하기 때문이다. 육의전에서 다루는 물품은 마땅히 금난전권을 지켜야 하지만 그 밖의 물품에 대한 매매를 단속, 금지하는 폐단은 일체 혁파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익을 얻는 사람은 많고 물가도 마땅히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섣불리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시전 상인과 노론 세력들의 원성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뻔한 상황에서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는 대책과 힘을 갖추지 못한 채 괜히 벌집만 쑤셔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던 채제공은 우의정에 오른 지 3년이 지난 1791년 1월 마침내 정조에게 ‘금난전권을 혁파하라’고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는 정조에게 ‘백성들이 입는 폐해로 말한다면 시전 상인의 매점매석 행위가 첫 번째이므로 만약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면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아뢴다.

채제공의 예상대로 노론 세력은 즉각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자신들의 최대 정치 자금원을 봉쇄당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노론은 당시 호조판서인 김문순을 중심으로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시전의 뿌리가 튼튼하고 또한 국가 부역의 부담을 지고 있는데 금난전권을 혁파한다면 시전은 장차 모두 망하고 말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을 하며 채제공의 건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때문에 ‘금난전권 혁파’는 자칫 미궁 속으로 빠질 뻔했으나 결국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에 대한 금난전권 폐지’라는 해결책을 찾아 시행될 수 있었다.

이로써 채제공은 ‘상업과 시장의 자유로운 발달을 통한 경제 개혁’이라는 자신의 포부를 현실 정치 무대에서 실현하게 되었다.

신해통공은 1894년(정조 18년) 갑인통공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이후 조선의 상품 유통과 화폐 경제 발달에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또한 이후 시전 상인에서 사상인 계층으로 상업 및 시장 권력과 경제적 부가 대대적으로 이동하는 일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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