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마냥 경쾌하고 발랄하며 맑고 깨끗한 풍경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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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마냥 경쾌하고 발랄하며 맑고 깨끗한 풍경 묘사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1.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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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⑨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이 말 위에서 바라본 무지개 풍경을 묘사한 ‘마수홍비기(馬首虹飛記)’라는 글을 보면 북학파 그룹의 문인들이 얼마나 ‘진경의 미학’에 탁월한 문장가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림보다 더 세밀하고 아름다운 묘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봉상촌(鳳翔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녘에 강화로 들어갔다. 5리쯤 가다 보니 그제서야 하늘이 밝아졌다.

그런데 한 점 구름도 한 올의 아지랑이도 보이지 않다가 해가 겨우 하늘에 한 자쯤 떠오르자 갑가지 먹구름 한 점이 까마귀 머리만 하게 해를 덮었다. 잠깐 동안에 해의 절반을 가려서 어두침침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한을 품은 듯 근심을 품은 듯 얼굴을 찌푸리며 불안한 것 같더니 빛줄기를 거침없이 뿜어대는데 모두 혜성을 이루었다. 성난 폭포수가 물줄기를 분출하듯 하늘로 내리쏘았다.

바다 밖 여러 산에는 제각각 작은 구름이 모습을 드러내고 멀리 서로 호응해 뭉게뭉게 독(毒)을 머금었다. 간혹 번개가 내리쳐 해 아래에서 번쩍이며 위엄을 부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온 세상이 검은빛으로 뒤덮였는데 번개가 번쩍하고 나서야 겹겹이 주름진 구름이 수천의 꽃가지와 수만의 꽃잎을 이루어 옷 가장자리에 가늘게 선을 돌려 덧댄 듯 꽃에 달무리가 드리운 듯 제각각 깊고 얕았다. 뇌성이 찢어질 듯해 흑룡이 뛰쳐나오지 않을까 싶은 의혹이 일었으나 빗줄기는 심하게 퍼붓지 않았다.

저 멀리 연안(延安)과 백천(白川) 사이를 바라보니 빗줄기가 명주 필을 드리워 놓은 것 같았다.

말을 재촉해 10여 리를 더 갔다. 갑자기 햇빛이 뛰쳐나와 점차 날이 밝고 고와졌다. 사나운 먹구름은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해 오색찬란한 기운이 가득 찼다.

말 머리 위로 기운이 한 장(丈)이 넘게 뻗어 엉긴 기름처럼 누르스름해 보였다. 잠깐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붉고 푸른빛으로 변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문을 본떠 지나다닐 수 있을 듯 하고 다리를 본떠 건너다닐 수 있을 듯했다.

처음 말 머리 위에 떠올라 손으로도 만질 수 있을 듯하다 가도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더 멀리 멀어져 갔다.

문수산성에 당도해 산기슭에 돌아서 강화부의 외성(外城)을 바라보았다. 강을 둘러싼 백 리 연안에 하얀 석회를 바른 성첩(城堞: 성가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햇빛 아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본 무지개발은 여전히 강 가운데 내리 꽂혀 있다.” 박지원, 『연암집』, ‘말 머리 위에 뜬 무지개를 보고 적다(馬首虹飛記)’

일출과 동시에 나타난 먹구름 한 점이 점차 커져 해의 절반을 가려 어두침침해지자 하늘에서는 거침없이 빛줄기를 뿜어대고 우레 소리는 귀를 찢을 듯 요란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10여 리를 더 나아가니 사나운 먹구름이 걷히고 오색찬란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무지개다.

그 모습은 마치 문(門)처럼 혹은 다리(橋)처럼 보인다. 말 머리 위에 떠오른 듯하여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으나 다가갈수록 멀리 달아날 뿐이다. 마치 무지개를 처음 본 어린아이마냥 풍경 묘사가 경쾌하고 발랄하며 맑고 깨끗한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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