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①대동법 실시를 둘러싼 대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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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①대동법 실시를 둘러싼 대논쟁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6.01.08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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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경제는 국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잣대다.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급속하게 보수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는 물론 과거 봉건시대에도 경제는 지배 권력의 근원이었다.

힘으로 가능했던 지배를 한층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때문에 많은 권력자들은 경제 지식으로 무장한 학자들을 영입해 그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현실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자와 경제이론은 서구 일색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경제학자들을 실학이라는 좁은 틀에 두고 서구 이론을 좇는데 급급하다. 우리 선조 가운데에도 수많은 경제학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헤드라인뉴스>는 2016년 조선시대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살피고 현실에서 그들의 경제이론들이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 효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 그의 줄기찬 노력에 의해 대동법과 화폐 유통이 도입되고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조선의 경제학자들] “백성의 삶과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 주창”

[한정주=역사평론가] 지난 세기 말에 겪은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17세기 조선은 또 다시 병자호란의 재앙과 마주쳐야 했다. 이 두 전란은 조선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더욱이 양대 전란 사이에는 광해군의 실정과 인조 서인 세력의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농촌 경제와 국가 재정의 파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최대 과제는 이처럼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되살리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뛰어넘어 17~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 사건은 ‘대동법의 실시’와 ‘화폐 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양대 전란과 뒤이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던 조선의 사회경제를 복원하는 거대한 에너지 역할을 했다.

17세기 조선의 역사를 뒤져 보면 대동법과 화폐 유통이 한 조정 관료의 줄기찬 노력에 의해 도입되고 또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효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다.

경제사학자들은 조선의 17세기를 ‘대동법을 둘러싼 대논쟁의 시대’라고 부른다. 대동법은 나라에서 현물(지방 토산물)로 받아온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해 받은 일종의 ‘조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법은 1608년(선조 41년) 경기도에서 최초 시행된 이후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대를 거쳐 무려 100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년)에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내역에 관한 기록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대동법의 시행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중종 때 조광조가 공안(貢案: 공물을 기록한 문서와 장부)을 개정하자고 주장하였고, 선조 때 이이가 수미법을 시행하자고 청하였다. 임진년(1592년) 이후에는 유성룡이 역시 미곡을 거두는 일이 편리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조 41년(1608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먼저 경기도에서 시작하고, 마침내 선혜청을 설치했다. 인조 2년(1624년)에 이원익이 다시 건의해 강원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했고 효종 3년(1652년)에는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시행했다.

효종 8년(1657년)에 김육이 다시 건의하여 전라도의 해안 마을까지 확대 시행했다. 현종 3년(1662년)에 김좌명(김육의 큰아들)이 청하여 산골 마을에까지 아울러 시행되었고, 숙종 3년(1677년)에는 이원종이 건의하여 경상도 지방에도 시행되었다. 숙종 34년(1708년) 황해도 관찰사 이언경의 상소로 황해도에까지 시행되었다.” - 『만기요람』 ‘대동법’

이 100년 동안 대동법은 조선 사회가 풀어야 할 최대의 화두이자 최고의 논쟁거리였다.

왜 조세정책에 불과한 대동법이 한 세기 동안이나 조선 사회 전체를 뒤흔들 만한 논란을 낳았을까? 그것은 대동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위로는 조정의 고위 관료들에서부터 아래로는 한 조각의 땅덩어리도 갖지 못한 빈농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 모든 계층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양대 전란과 정치적 혼란으로 붕괴된 나라 경제와 재정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의 노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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