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 묘사에는 그림보다 유기(遊記)”…강세황의 금강산 유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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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 묘사에는 그림보다 유기(遊記)”…강세황의 금강산 유람기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3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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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⑤
▲ 강세황과 금강산 유람을 함께 한 김홍도의 그림 ‘해금강 전면’.

[한정주=역사평론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난 후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나 일삼는 시보다는 차라리 ‘유기(遊記)’가 진경을 묘사하는 데 더 낫다고 말한 강세황은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지은 바 있다.

특히 강세황은 금강산을 그린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은 진경을 묘사하는 데 부족하다는 비평과 함께 자신이 비록 금강산의 진경을 그려보고 싶지만 붓이 낯설고 솜씨가 모자란 것이 한이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글과 그림에 모두 탁월한 솜씨가 갖고 있었던 강세황조차도 금강산의 진경을 비슷하게나마 묘사하기에는 그림보다 차라리 글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당시 문인들의 ‘진경 산문’에 대한 애착을 읽을 수 있다.

이때 김홍도 또한 강세황의 금강산 유람에 동행했다. 이 해가 1788년(정조 12년) 가을 무렵으로 강세황의 나이 76세이고, 김홍도의 나이 44세 때였다.

두 사람 모두 그림에 관한 한 이미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완숙미(完熟美)의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그림보다 ‘유기(遊記)’가 진경 묘사에 더 낫다고 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을 유람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세상 제일 나쁜 일이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금강산이 유람할 만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은 삼신산에 속하는 신선 지역이요 영험한 진인(眞人)들의 거처로 온 나라에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어린 아니라 부녀자들까지도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연스레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 생각건대 옛날에 이 산이 중들의 꼬임에 당한 탓에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어 요즘보다 더 많을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장사치, 걸인, 시골 할망구들이 줄을 이어 동쪽 골짜기를 찾는데 저들이 어찌 산이 어떤 의미를 가진 줄 알겠는가. 다만 죽어도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 마디 말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사대부 중에 유람하는 사람들이야 어찌 걸인이나 시골 할망구와 모두 같겠는가마는 산의 모양과 물의 기세 중 어떤 것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또 어떤 것이 매우 특별한지를 저들이라고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또한 다만 여러 사람을 따라 평생 동안에 단 한 번 유람한 것을 자랑으로 여겨 다른 사람에게 과장하기를 마치 하늘 신선의 궁에나 간 듯 한다. 유람하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사람 축에 못 낄까 두려워하듯 하니 내가 싫어하면서 세상 제일의 나쁜 일이라고 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중년에 간혹 사람들 중에 이 산을 함께 유람하고자 나에게 청하는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식량과 여비까지 준비하여 굳이 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고자 하지 않았다. 속됨을 싫어하는 마음이 산을 좋아하는 것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비단에 채색, 88.7×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무신년(1788년) 가을 아들이 회양(淮陽) 부사에 임명되었으므로 나도 따라서 회양 관아에 이르렀다. 금강산은 회양에 속한 땅이니 부치(府治)와의 거리가 130리이다. 이때 마침 찰방 김응환과 찰방 김홍도가 영동 아홉 개 군의 명승을 두루 다 유람하면서 들르는 곳마다 그 경치를 그린 후 장차 이 산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이때에는 속됨을 싫어하는 마음으로도 산을 좋아하는 성질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9월13일 관아를 떠나서 김흥환, 김홍도 두 김군과 막내아들 빈(儐), 서자 신(信), 친구인 임희양, 황규언 군과 함께 신창(新倉)을 향해 출발했다.

이튿날에도 계속 가다 보니 산길에는 단풍잎이 비단처럼 알록달록했다. 바람이 갑자기 서늘해지더니 때마침 눈발이 날려 옷깃을 때렸다. 아들 신과 김홍도는 말 위에서 퉁소를 불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면서 서로 화답하였다.

… 날이 저물고 나서야 비로소 장안사에 도착했다. 절은 예로부터 이름난 사찰로 지금은 이미 스러져 다리는 끊기고 누대는 무너졌다. 중들도 뿔뿔이 흩어져 큰 집에 주인은 없고 다만 별 볼일 없는 종들 몇만 남아 서로 의지하며 지키는 듯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 이튿날은 15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법당 불상을 대강 보았다. 이른바 사성전(四聖殿)이라는 곳 안에는 십육나한상이 있었는데 솜씨가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들었으니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사찰은 산의 초입에 있어서 금강산의 문 역할을 한다. 산의 기세와 시내 소리에 이미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김씨는 대략 모양을 그렸고 나도 절 뜰에 나와 앉아 보이는 것들을 그렸다. 산 높이가 몇 백 길이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장엄하고 훌륭하여 빼어나게 큰 사람이 아무 데도 의지하지 않은 채 우뚝이 서있는 듯하였다.

상봉(上峰) 오른편에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가파르게 깎고 새긴 듯한 모양이라 다른 봉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상봉 왼편에는 조그마한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는데 첩첩이 쌓인 봉우리 옆으로 약간 드러나 있다. 그 빛깔은 은을 녹인 것 같았으니 이것이 혈망봉(穴望峰)이다. 금강산 전체로 보자면 이것은 하나의 저민 고기와 같다.

밥을 먹은 후 옥경대라는 곳으로 향하였다. 하나의 둥근 모양 돌이 백 칸짜리 집채만 하였다. 그 위에 오르자 깎아지른 듯한 벽이 보였는데 의지한 곳 없이 홀로 우뚝하였다. 위는 널찍하고 아래는 좁아서 마치 거울 자루를 경대에 새워둔 것과 같았으니 이것을 명경대라 한다. 터를 이룬 둥근 바위는 이름이 옥경대라 한다. 대 앞 맑은 못이 거울 같으므로 옥경이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이른바 황천강(黃泉江)이니 지옥문(地獄門)이니 하는 것은 모두 비길 데 없이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붓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못된다.

… 길 옆에는 커다란 바위벽이 서 있었다. 위쪽에 세 개의 불상을 새겼고 왼쪽 면에도 여러 개의 불상을 그렸으며 또 그 옆으로 53개의 작은 불상을 새겼다. 중의 설명이 번다하여서 다 물을 수는 없었다.

또 백화암을 지났는데 암자는 이미 빈 채, 중 하나만 지키고 있다 한다. 암자 옆 땅이 자못 평탄한 곳에 큰 비석 서너 개와 부도 대여섯 개가 있었다. 모두 옛날의 유명한 승려의 유적이라 한다.

표훈사에 들어 조금 쉬고는 길을 꺾어 만폭동(萬瀑洞)으로 향하였으나 폭포는 하나도 없고 큰 시내에서 물이 내리쏟아지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바위벽의 기세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았다. 아래로는 흰 돌이 쭈욱 어지러이 깔려 있었다. 바위 면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커다란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양이 가까워 오므로 서둘러 정양사(正陽寺)로 향하였다. 절은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갈수록 가마꾼이 땀을 흘리며 헐떡거렸다. 길도 매우 위태로웠다. 헐성루 앞에 도착하여 가마에서 내렸다. 누대에서 금강산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있다고들 하므로 재빨리 누대에 올라 앞 난간에 섰더니 많은 봉우리가 겹겹이 쌓여서 형상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중들이 막대기 끝으로 가리키며 저건 무슨 봉우리, 저건 무슨 골짜기라 하는데 모두 분별할 수는 없었다. 오직 산의 동북쪽 가장 먼 곳에 흰 색 돌기둥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위는 둥근 봉우리가 덮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중향성과 비로봉임을 알 수 있었다.

누대 앞에 온갖 봉우리가 비록 매우 웅장하고 기이할지라도 이것들은 산에서는 예사롭게 볼 수 있는 경치이다. 옥 같은 죽순이 다투어 솟아 있는 듯, 서릿발 드러내는 칼날이 늘어서 있는 듯한 중향봉 같은 것은 이 산 제일의 기이하고 환상적이며 아름다운 경치이다.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곳임은 물론이요, 중국의 이름난 중에서 보더라도 또한 다시 찾을 수는 없을 곳이다. 몇 폭에다 대략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는데 날은 이미 저물었다.

급히 누대에서 내려와서 표훈사로 돌아오려는데 벽에 오도자(吳道子)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육면으로 된 누각 벽에 비단에 그려진 불상이 있는데 그만그만한 중 무리의 그림일 뿐만 아니라 필적도 매우 최근 것이어서 논할 가치도 없었다.

이미 가마에 올랐는데 가마꾼이 말하기를 ‘여기에서 천일대까지는 몇 걸음밖에 되지 않으니 올라 보지 않으시렵니까?’ 하기에 곧 웃으며 허락하였다. 길옆에 계수나무가 있다기에 사람을 시켜 꺾어 오게 하여 보니 익가목(益加木)이었다. 그 맹랑하고 거짓됨이 이와 같았다. 그제서야 표훈사에 가서 머물러 잤다.

16일 아들 빈(儐)과 여러 사람들은 수미탑과 원통암 등 여러 곳을 다녔으나 나는 매우 피곤하여서 쫓아갈 수 없었다. 아들 신(信)과 함께 절에 머물며 쉬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다시 만폭동에 갔다. 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는데 날이 저물어서 절로 되돌아왔다. 어두워진 후에야 사람들이 돌아와서는 보고 온 경치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또 길이 너무 험하여 가마를 탈 수 없으므로 모두 걸어서 오가느라 매우 지쳤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편안히 앉아 쉰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두 김군이 백탑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표훈사에서 잤다. 17일 우리 일행은 곧장 관아로 돌아왔고, 두 김군은 유점사로 가서 여러 승경을 두루 유람한 후 회양의 관아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내가 산에 들어가 불과 세 밤을 잤는데 표훈사에서 두 밤을 잤고, 하루는 휴식을 취하였다. 유람한 것이 겨우 하루 이틀인데 몇 폭의 진경(眞境)을 그려서 돌아왔다. 금강산을 대강 유람한 사람 중에 마땅히 나와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산을 유람한 사람들은 으레 시를 짓는데 혹 하나의 봉우리나 하나의 골짜기, 각 절이나 암자마다 제목을 붙여 각기 한 편씩을 지으니 마치 일정을 기록한 일기와 같다. 만이천봉이 옥색 눈 같다거나 비단결 같다는 표현은 사람마다 똑같으므로 읽고 싶지도 않다. 이런 시들을 읽혀서 이 산을 못 가본 사람들이 마치 이 산 속에 있는 듯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만약 모습을 비슷하게 표현한 것으로 말한다면 오직 유기(遊記)가 가장 좋다. 그러나 이따금은 늘려서 지나치게 설명을 하여 두꺼운 분량으로 만들다 보니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므로 보는 사람을 더 싫증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오직 그림만은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나중에라도 누워서 보며 즐길 수 있을 것인데, 이 산이 생긴 이래 그림으로 나타낸 사람이 없었다.

근래에 정선과 심사정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이름이 났다. 각자 그린 것을 보면 정선은 평소 익숙한 필법으로 자유롭게 휘둘러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상까지도 한결 같이 열마준법(裂麻皴法)으로 어지럽게 그렸으므로 진경을 묘사하는 데에는 논하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반면 심사정은 정선보다는 약간 뛰어나지만 그 역시 고아하고 넓은 식견이 없다. 내가 비록 그려보고 싶지만 붓이 낯설고 솜씨가 형편없어서 할 수 없었다.” 강세황, 『표암유고(豹菴遺稿)』,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강세황 지음, 김종진‧변영섭‧정은진 옮김,『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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