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장 ‘진경(眞景) 시와 산문’의 등장…조선 고유 색(色)·풍(風)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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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장 ‘진경(眞景) 시와 산문’의 등장…조선 고유 색(色)·풍(風) 추구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1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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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⑤ 진경(眞景)의 미학…글은 살아있는 풍경이다①
▲ 겸재 정선, 선유봉, 1742, 비단에 채색, 33.3x24.7cm.

[한정주=역사평론가] 오늘날 조선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문화적 개념어 가운데 ‘진경시대(眞景時代)’라는 용어가 있다.

진경시대란 무엇인가? 이 용어를 사실상 창안했다고 할 수 있는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씨는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文化絶頂紀)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진경시대의 시작은 겸재(謙齋) 정선이라는 걸출한 화가에 의해 발흥(發興)했다. 정선이 등장하기 이전 조선의 사대부나 화가들은 중국의 이론서로 그림공부를 하고, 더욱 심각하게는 중국의 산수(山水)와 중국 사람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관념산수화풍(觀念山水畵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단(畵壇)의 중국 종속성은 정선의 등장과 함께 말끔히 사라지고 만다.

숙종(肅宗) 초에 태어나 영조(英祖) 시대에 주로 활동한 정선은 조선의 독자적인 산수화풍(山水畵風)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시했다. 그는 중국 산수와 중국 사람을 소재로 삼은 관념산수화의 잔재를 완전하게 청산하고 조선 산천(山川)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 사람의 모습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였다.

스무 살 초엽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35살이 되었을 때 금강산 여행에 나서면서 조선의 자연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정선은 이후 18세기 조선의 산수화를 완성하며 회화 분야의 독보적인 대가(大家)로 거듭나게 된다.

특히 그가 남긴 전국 각지의 명산 풍경, 즉 박연폭포와 금강산, 인왕산 그리고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남겨 놓은 한강 주변의 그림들은 빼어난 아름다움 못지않게 옛적 우리 산천에 대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그것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없었다면 영원히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조선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았던 진경산수화는 사대부 화가인 강희언과 강세황을 거쳐 정조 시대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 이르러 최고 절정기를 누리게 된다.

이렇듯 회화 분야에서 처음 등장한 조선의 고유한 ‘색(色)’과 ‘풍(風)’을 추구하는 문화사의 흐름은 문학 분야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때 등장한 새로운 문장이 다름 아닌 ‘진경(眞景) 시와 산문’이다.

특히 ‘진경 시와 산문’을 읊고 지은 문인들은 정선(1676∼1759년)이 죽고 난 후 활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전 시대에도 정선이 금강산을 직접 찾아가 그린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 ‘금강산전도(金剛山全圖)’처럼 조선의 산천을 유람하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사실적인 묘사와 표현이 돋보이는 산행기(山行記)나 유람록(遊覽錄)을 남긴 이들도 있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어우당 유몽인이나 17세기 중후반에 주로 글을 썼던 미수 허목이 그렇다.

먼저 우리 역사 최초의 야담집이라고 할 수 있는 『어우야담』을 썼을 만큼 독창적이고 개성이 강한 문장가였던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록(遊頭流錄)’을 읽어 보자.

“새벽이 다가오자 길을 나서서 옹암(甕巖)을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도착했다. 수풀을 뚫고 너덜겅을 거쳐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허리를 구부려 그늘진 골짜기를 바라보니 어둠침침했다. 정신이 몽롱하고 눈앞이 어지러워 나무를 붙잡고 기댔다. 깜짝 놀란 마음을 달랠 수 없어 다시 쳐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영랑(永郞)은 신라 시대 화랑의 우두머리였는데 낭도 3000여명을 거느리고 온 세상을 마음껏 유람했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산과 강에 영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산허리를 따라서 천왕봉을 가리키며 동쪽으로 향했다. 거센 바람 탓에 나무들은 모두 제대로 자라지 못해 조그마했다. 나뭇가지는 산쪽을 향해 굽어 있고 이끼는 나무를 뒤덮어서 헝클어진 모양새가 마치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이 서 있는 듯 했다. 껍질과 잎만 남은 소나무와 잣나무는 속은 텅 빈 채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고 나뭇가지는 아래로 내리 뻗어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을 높이 오를수록 나무는 더욱 더 작달막했다. 산 아래로는 농 짙은 그늘이 비취빛과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당도하니 꽃가지에는 미처 잎이 돋지 않고, 끝부분에만 마치 쥐의 귀처럼 새싹이 돋아 있었다.

바위틈에 눈이 한 자 가량 쌓여 있어서 한 움큼 쥐고 갈증 난 목을 축였다. 겨우 싹이 돋아 난 풀이 있었는데, 그 푸른 줄기를 ‘청옥(靑玉)’이라고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고 했다. 어떤 스님이 ‘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만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 움큼 뜯어 움켜쥐고 오길래 내가 “그대가 청옥과 자옥이라고 부른 풀이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 약초)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서는 지팡이를 땅에 꽂아두고 손수 풀을 뜯어서 가득 안았다.

그곳에서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고개를 들어 천왕봉을 바라보니 구름 가운데 높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잡목과 잡초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푸른 잣나무만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서리와 눈보라와 거센 비바람에 시달리느라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말라 죽은 고사목(古死木)이 열 가운데 두셋이나 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반백의 노인처럼 보이는데 거의 뽑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소년(少年)’이라고 한 것은 혹 신라의 화랑인 영랑(永郞)의 무리를 일컫는 듯 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천왕봉을 받들어 뜻을 잇는 소년과 같다고 해서 ‘소년대’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천의 산과 수 만의 골짜기가 주름이 접힌 듯 펼쳐 있었다. 이곳도 이러한데 하물며 최고의 봉우리에 오르면 어떠하겠는가?

▲ 유몽인의 초상(왼쪽)과 『어우야담』.

마침내 지팡이를 날듯이 내저어서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 위에는 판잣집이 있는데 바로 성모사(聖母祠)이다. 사당의 중앙에는 석상이 하나 안치되어 있는데 백의(白衣)의 여인상이다. 나는 성모가 누구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어진 임금을 낳고 길러 삼한을 통일했기 때문에 이를 높여서 제사를 지냈다. 그 의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남과 호남에서는 이곳을 찾아와 성모를 떠받들며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무당들이 이 성모사를 섬기는 풍속에 의지해 먹고 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굽어보며 살피다가 유학자나 관리들이 오면 즉시 토끼나 꿩처럼 뿔뿔이 흩어져 숲 속에 몸을 감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엿보고 있다가 산을 내려가면 다시 모여들곤 한다.

천왕봉 밑으로는 판잣집이 빙 둘러 늘어서 있는데 마치 벌집 같다. 이곳은 장차 성모사에 복을 빌러 오는 사람들이 머무르거나 묵게 하려는 것이다. 재물로 삼는 짐승을 죽이는 일은 불가(佛家)에서 금지하기 때문에 소나 가축을 산 및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은 이것을 취해 삶의 밑천으로 삼는다. 이에 성모사와 백모당(白母堂)과 용유당(龍遊堂)은 무당들이 우글대는 3대 소굴이 되었다. 참으로 분노할 만한 일이다.

이날 산에 내린 비가 그쳐 날이 개자 사방에서 안개와 구름이 걷혀, 눈앞에 넓고 아득한 광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마치 하늘이 명주 장막으로 봉우리를 병풍처럼 둘러친 듯 했다. 감히 시야를 가로막고 정신을 어지럽히는 어떤 언덕 무더기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얽혀서 푸른 것은 산이고 감아 돌아서 하얀 것은 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어느 곳이 땅이고, 강이고, 언덕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시험 삼아 산 속의 승려가 가리키는 지점을 따라 이름을 살펴보았다. 동쪽을 바라본즉 대구의 팔공산·현풍의 비파산·의령의 자굴산·밀양의 운문산·산음의 황산·덕산의 양당수·안동의 낙동강이 있다.

서쪽을 바라본즉 광주의 무등산·영암의 월출산·정읍의 내장산·태인의 운주산·익산의 미륵산·담양의 추월산·부안의 변산·나주의 금성산과 용구산이 있다. 남쪽으로 소요산을 바라본즉 곤양임을 알고 백운산을 바라본즉 광양임을 알고, 조계산과 돌산도를 바라본즉 순천임을 알겠다.

사천의 와룡산을 바라보니 지난 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동일원의 패배가 생각나고 남해의 노량을 바라보니 장군 이순신의 죽음이 떠올라 비통함을 감출 수 없다. 북쪽으로는 안음의 덕유산과 전주의 모악산이 단지 하나의 개미집처럼 보였다. 그 중앙에 마치 큰 아이처럼 약간 솟아오른 것이 성주의 가야산이다. 삼면에 큰 바다가 둘렀는데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이 큰 파도 한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했다. 대마도의 여러 섬들은 마치 한 알의 탄환 마냥 아득했다.

아아! 덧없는 세상의 삶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가 그곳에서 죽는 초파리 무리를 장차 모두 쓸어 거두어도 한 움큼도 채우지 못한다. 인간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은데 구구절절 자신만 내세우며 기쁘니 혹은 슬프니 야단법석이다. 어찌 크게 껄껄껄 웃을만한 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오늘 본 것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늘과 땅 역시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작은 사물에 불과하다. 이곳에 올라 높다고 떠벌이는 것이 어찌 거듭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당 아래로 작은 움막이 있었다. 잣나무 잎을 엮어서 간신이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은 매 움막입니다’라고 했다. 매년 8월에서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사냥꾼들이 봉우리 정상에 그물을 설치해놓고 기다린다고 했다. 대개 하늘 높이 잘 날아오르는 매는 천왕봉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잡은 매는 그 재주와 기량이 아주 출중하다.

지리산 주변의 관청의 매는 대부분 이곳 천왕봉에서 잡혔다고 한다. 그들 매 사냥꾼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이곳에서 삶을 마친다. 어찌 관청의 위엄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는가? 또한 대개 이로움을 얻고자 생명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반상 위의 진귀한 음식 한 입 씹기에도 모자라지만, 백성들의 만 가지 고통과 간난(艱難)이 이와 같은 줄이야!!

해가 저물어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갔다. 이 암자는 천왕봉을 내려가 몇 리 쯤 가야 있다. 요초를 끓이고 향기로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남쪽 언덕에서 바라보니 바위들이 어지럽게 솟아 있었다. 향적암은 작은 암자에 불과했지만 붉은 빛과 푸른 빛으로 단청을 잘해놓았다. 북쪽으로는 천왕봉을 우러러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본다. 산의 형세가 호걸스럽고 뛰어나 주변의 산과는 자못 다른 자태를 지녔다. 유몽인, 『유두류산록』, ‘지리산 유람록(遊頭流錄)’

특히 유몽인은 ‘진경의 미학’의 단초가 될 만한 이야기를 『어우야담』에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그림과 문장은 서로 다르지 않다고 역설하면서 “본뜻과 참 모습을 담고 있지 않다면 비단 같은 문장과 아름다운 글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옛날 중국에서 뛰어난 그림을 사 온 사람이 있었다. 큰 소나무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얼굴을 쳐들고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신채(神采: 정신과 풍채)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세상 사람들이 천하의 기이한 솜씨로 여겼는데 화사(畵師) 안견이 말했다. ‘이 그림이 비록 좋긴 하지만 사람이 얼굴을 쳐들면 목덜미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게 마련이다. 이 그림에는 이것이 없으니 그림의 뜻을 크게 그르쳤다.’ 이로부터 결국 버려진 물건이 되고 말았다.

또 옛 그림 중 신묘한 필치라 일컬어지는 것이 있었는데 노인네가 어린 손주를 안고 밥을 먹이는 그림이었다. 신채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는데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이 그림이 비록 좋긴 하지만 무릇 사람이 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는 반드시 자신도 스스로 입을 벌리는 법이다. 이 그림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니 화법을 크게 그르쳤다.’ 이로부터 마침내 버려진 그림이 되었다.

대저 그림과 문장이 무엇이 다르랴! 반면 본뜻을 그르치면 비록 비단 같은 문장과 수놓은 듯한 아름다운 글귀라도 식자는 취하지 않는다. 오직 안목을 갖춘 사람만이 이를 알 수 있다.” 유몽인, 『어우야담』(유몽인 지음, 신익철 옮김,『어우야담』, 돌베개, 200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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