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글쓰기 철학 ‘사달(辭達)’…장유와 이식의 비판적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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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글쓰기 철학 ‘사달(辭達)’…장유와 이식의 비판적 수용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2.03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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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④ 옛것과 새것의 변통과 통섭…법고(法古)와 온고(溫故)의 미학⑨
 

[한정주=역사평론가] 유학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論語)』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자의 ‘글쓰기 철학’은 크게 보아 ‘사달(辭達)’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보면 “子曰(자왈) 辭(사)는 達而已矣(달이이의)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문장은 뜻을 전달할 따름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술이(述而)’편에 보면 “子曰(자왈) 述而不作(술이부작)하며 信而好古(신이호고)를 竊比於我老彭(절비어아노팽)하노라”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옛것을 서술하되 임의대로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따르고 좋아하는 일을 나는 마음속으로 노팽(老彭)과 비교해 본다”라는 뜻이다.

문장은 뜻을 전달할 따름이라는 ‘사달(辭達)’은 공자의 문장론이라고 할 수 있고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은 옛것을 사실대로 기록해 전하되 자기 마음대로 새롭게 짓지 않는다는 공자의 역사 서술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장론이나 역사 서술론은 모두 글로서 자신의 뜻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뿌리는 동일하지만 그 가지, 곧 장르가 다른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중 계곡 장유와 택당 이식은 공자의 문장론인 ‘사달(辭達)’, 즉 법고(法古)를 자신들의 문장 철학 속에서 새롭게 해석한 곧 ‘창신(創新)’한 흥미로운 글을 남겼다.

먼저 장유는 자신보다 이전 시대인 선조 연간의 명문장가인 간이 최립의 문집인 『간이당집(簡易堂集)』에 ‘서문(序文)’을 써주면서 사달(辭達)이 분명 성인인 공자의 말씀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문장을 이룰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문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공자가 말한 ‘사달(辭達)’을 구실로 삼곤 한다. ‘사달’은 말이란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사달’이라는 말은 분명 성인의 말씀이다. 또한 말은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멀리까지 전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개 언어란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전달 방식이다. 그러나 문장의 형태를 갖추어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자의 글이라고 일컬어지겠으며 그 빛을 영원히 발할 수 있겠는가? 이와 관련해 한유는 진부한 말을 없애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예부터 지금까지 글을 지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진부한 말을 내놓지 않는 사람들만이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장유, 『계곡집(谿谷集)』, ‘간이당집 서문’

문장은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달(辭達)’에 그쳐서는 안 되고 제대로 문장의 형태를 갖추어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또한 옛사람들이 이미 사용한 진부(陳腐)하거나 상투적인 내용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지 않으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택당 이식은 비록 ‘사달(辭達)’이 글쓰기의 근본이지만 사람들이 지닌 뜻이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듯이 문장에도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넓고 화려한 문장이나 기이한 묘사와 절묘한 표현을 부린 문장이나 찬란한 풍경과 드높은 광채를 지닌 문장 모두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예전에 소동파가 문장에 대해 논하면서 공자가 말한 ‘사달(辭達)’이란 한 구절을 글쓰기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을 설명한 사람이 ‘달(達)이란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문장을 지을 때 자신의 뜻만 잘 전달하면 된다. 미사여구를 요란하게 나열하는 일을 높이 받들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지적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물도 똑같은 것은 없다. 만물의 근원은 하나지만 나누어지면 각각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갖는 사물이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지닌 뜻도 멀고 가까운 차이가 있고, 문장에도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다.

상고시대인 우나라,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문장을 보더라도 이미 순수하고 소박하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차이가 있었다. 하물며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과 그 제자 송옥 이후로 시문의 체재가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여러 무리가 각자 수레바퀴를 나란히 하고 치달리게 된 시대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똑같이 그 뜻을 드러내면서도 문장의 법도를 잃지 않아 화려하게 치장한 수레가 먼 길을 가듯 혹은 표범의 반점이 아름다운 무늬를 자랑하듯 찬란한 빛을 발했다. 이 또한 문장의 지극함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또한 명나라 융만 시대 이후로도 여러 대가들이 중국에 출현해 크게 문장을 일으켰다. 이때 중국의 문장을 이어받아 화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 사람이 나왔으니 그가 명문장가 현주 조찬한이다.

조찬한의 학문은 옛것을 살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 문장 역시 옛것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위 시대로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딛고 아래로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밟고 있으면서도, 공자가 언급한 ‘사달’의 뜻을 잃지 않았다. … 이에 글이 막힘없이 쏟아져 나오고 기이한 표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조찬한의 문장은 찬란한 풍경과 드높은 광채를 지녔고, 그 재간이 크고 뛰어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끝도 없이 내달리다가도 또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절제할 줄 알았다. 그러다가 가끔 감정을 풍부하게 일으켜 글의 대상과 자신이 한 몸이 되곤 했는데, 생황과 경쇠가 서로 어우러져 소리를 내다 여운을 남기는 듯 아름다웠다.” 이식, 『택당집(澤堂集)』, ‘현주유고(玄洲遺稿) 서문’

이렇듯 현달한 문장가들은 유학을 학문과 문장의 바탕으로 삼아 공부를 하고 글을 지었지만 비록 『논어』 속 구절이라고 해도 무조건 맹신하기보다는 자신의 뜻과 의견에 따라 변용하거나 새롭게 해석해 사용할 줄 알았던 지혜와 창의력을 갖추고 있었다. ‘법고(法古)’하면서 동시에 ‘창신(創新)’할 줄 알아서 옛것과 새로운 것의 변통(變通)과 통섭(通燮)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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