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일곱 차례 중국 전역을 답사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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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일곱 차례 중국 전역을 답사한 이유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승인 2015.11.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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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④ 옛것과 새것의 변통과 통섭…법고(法古)와 온고(溫故)의 미학⑧
▲ 『사기』를 집필하는 사마천과 타이완 국가도서관 수장의 『사기』 고본.

[한정주=역사평론가] 사마천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중국 전역을 여행하고 역사와 문화 현장 몸소 답사하면서 견문과 지식과 정보를 축적했기 때문에 『사기(史記)』라는 대작(大作)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사마천이 자전적 기록이자 『사기』 저술의 배경과 동기를 밝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무엇보다 먼저 스무 살 때부터 시작한 자신의 ‘역사와 문화 여행 편력’을 자세하게 기술한 까닭 역시 그 여행이 『사기』를 집필하고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 황하 북쪽과 용문산 남쪽 기슭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렀다. 열 살 때 옛날 문헌(古文)을 암송했으며 스무 살 때는 남쪽으로 장강과 회하를 유력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임금이 죽어서 들어갔다는 동굴을 탐험하고 (순임금이 매장된) 구의산도 살펴보았으며 원수(沅水)와 상수(湘水)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였다.

그러다가 북쪽으로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수도에서 학업을 닦고 공자가 남긴 풍속을 살펴보았으며 추현(鄒縣)과 역산(嶧山)에서는 향사(鄕射: 활쏘기 의식)를 살펴보았다.

파현(鄱縣), 설현(薛縣), 팽성(彭城) 등에서 재앙과 곤란을 겪고 양나라와 초나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사마천은 관직에 나가 낭중이 되어서 칙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파와 촉 남쪽 지역을 정벌하고 남쪽(서남이)으로는 공(邛)과 작(苲)과 곤명(昆明)을 공략하고 돌아와서 다시 명을 받들었다.”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사기열전②』, 민음사, 2007, p874〜875 인용)

이것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육체로 쌓은, 즉 현장에서 체득(體得)한 견문과 지식과 정보다.

비슷한 맥락에서 옛글을 잘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홍길주의 말 역시 ‘법고(法古)의 방법’으로 한번 쯤 음미해볼 만하다.

“옛사람의 좋은 작품을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먼저 그 뜻이 말미암아 들어간 경로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 뒤라야 가져다가 자기의 소유로 만들 수가 있고 훗날 글을 지으면 문득 그 묘처와 방불하게 될 수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옛사람의 글을 읽으면 한갓 겉으로 드러나는 광채와 기세만 보고 먼저 놀라서 스스로 미칠 수가 없다고 단정 짓고는 오직 그 찌꺼기만을 주워 모아 공령문의 쓸 거리로 삼는다.” 홍길주, 『수여방필』

“옛사람의 아름다운 작품과 다른 이의 빼어난 구절을 읽어도 그 좋은 점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취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도 못한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깨달은 바가 다만 구절이 이루어진 뒤에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에 있을 뿐 구절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각을 얽어 이리저리 표현해낸 경로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다른 이의 안내를 받아 이름난 누각과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누각에서 바라본 강과 산, 아지랑이 낀 숲의 빼어난 경계나 경치 속에 있는 대와 나무, 바위의 기이함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다 기억하면서 정작 어느 길을 따라갔는지, 어느 고을을 거쳤는지, 어느 주막에서 자고 어느 고개를 넘었는지, 아니면 어떤 시내를 건너 이곳까지 이르렀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아 훗날 안내자가 없이는 죽을 때까지 그 장소에 이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옛날에 이름난 작가나 앞 시대의 거장을 본받으려면 모름지기 먼저 그 사람이 글을 지을 때 마음이 말미암아 들어간 경로를 찾아 이를 훔쳐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바야흐로 잘 배웠다고 일컬을 수 있다.” 홍길주, 『수여난필속』

그리고 홍길주는 이 글의 끝부분에 덧붙이기를 “자기가 구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그 사람이 생각을 얽은 경로와 꼭 맞지는 않는다 해도 이처럼 노력하면 반드시 융합되어 묘리를 깨닫는 날이 있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이 융합하는 오묘한 이치를 깨달아 터득하게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또한 정약용은 자신의 두 아들, 정학유와 정학연에게 부치는 글에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글쓰기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히 세워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우리나라(조선)의 실정과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깊숙하게 배어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 학문과 문학을 외면하거나 배척하는 풍토를 크나큰 병폐라고 비판한 다음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저서와 문집을 눈여겨보라!”고 당부했다.

폭넓은 독서와 두루 공부하는 것, 즉 ‘법고(法古)’하는 가운데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을 짓는다면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創作) 활동”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삼대(三代) 이상의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요즘 들어 몇몇 젊은이들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경박하고 망령된 문인들의 볼품없고 메마른 문장을 모방해 절구와 율시를 짓고서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문장가라도 되는 듯 거만을 떤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글을 보잘것없다고 헐뜯고,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글을 쓸어버리려고 한다. 이런 젊은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經濟書)를 즐겨 읽어야 한다. 마음속에 항상 모든 백성을 보살피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생각을 품은 후에야, 글을 읽은 참다운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너희들은 내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근 수십 년간 괴상한 논리와 주장들이 난무하여 우리 문학을 크게 배척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저서와 문집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것은 진실로 크나큰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우리 옛일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남겨 놓은 작품과 기록을 읽지 않는다면, 그의 학문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다 하더라도 거칠거나 쓸모없는 재주에 불과할 뿐이다.” 정약용, 『다산시문집』, ‘두 아들에게 부치다(寄兩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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