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부채가 지배하는 사회

2016-05-20     심양우 기자

한국경제의 장기불황 국면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곳곳에서 가계부채를 뇌관으로 지목하고 있다.

정부와 은행권은 가계부채가 1200조원을 넘어서자 한국경제에 치명적인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 여신심사 선전화 가이드라인을 대책으로 내놓고 4개월째 시행 중에 있지만 이렇다 할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014년 8월과 10월, 지난해 3월과 6월 기준금리를 각각 0.25%씩 내린 이후 11개월째 동결하고 있다.

160만 가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가계부채가 줄어들기는커녕 불어나고 있어 경기가 침체되고 있지만 금리인하의 실효성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16일에는 OECD까지 ‘한국경제보고서’를 통해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에 잠재적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며 주택담보대출 규제 강화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개인의 삶도 부채로 인해 피폐해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계부채, 학자금부채, 의료부채, 거주부채 등 갖가지 빚으로 개인의 삶은 위태롭기만 하다.

통계청의 ‘2015년 가계금융 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계는 가처분소득의 25%를 대출 원리금(원금과 이자)을 갚는 데 쓰고 있다. 대출을 받더라도 70%는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럽다. 소득 증가 속도에 비해 갚아야 할 부채 증가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라는 불변의 교리에 따라 공적자금은 거대 자본을 돕지 못해 안달이다.

위기에 처한 조선·해운업체들의 도산이 금융부문의 부실로 옮겨가면서 과거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겠다며 선제적 구조조정의 재원을 가계에 책임지우고 있는 것이다.

신간 『크레디토크라시』(갈무리)의 저자 앤드류 로스는 는 이러한 사회를 가리켜 ‘크레디토크라시(creditocracy)’라 부른다.

‘creditor(채권자)’와 ‘-cracy(통치)’의 합성어인 크레디토크라시는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재원이 부채로 조달되는 사회”이자 “채권자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협치 양식 혹은 권력유지 양식”을 뜻한다.

즉 비인격적인 화폐적 채무관계가 사회적·개인적 삶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와 그 총체적 기능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부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채권자 계급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부채의 사슬에 저항하는 세계 곳곳의 직접 행동에 주목한다.

‘더러운 부채’에 대한 상황거부로 시작된 남반구의 부채저항운동은 오늘날 1%의 채권자들에 저항하는 99%의 부채파업, 생태부채 상환을 요구하는 투쟁의 형상으로 세계 곳곳에서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저항의 최초 계기를 인간의 내면을 속박하는 상환의 도덕률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찾고 있다.

“당신은 빚이 아니다(you are not a loan!)”라는 짧은 글귀에는 집단적 지성 특유의 심오한 통찰과 번득이는 재기가 깃들어 있다.

즉 “당신은 무능하거나 경제적 도덕관념이 박약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몫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는 이 사회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짐스러운 존재=빚’이 아니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 곳곳의 저항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대안경제’의 싹을 틔워내고 있는 실험들에 눈을 돌릴 것도 요청한다.

신용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공동체지원농업 등의 형태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호부조적이고 비영리적이며 공통적인 제도와 활동, 약탈적 경제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팽배한 남유럽 지역들에서 활발하게 모색되고 있는 시간은행, 소셜머니, 공동체 화폐 실험들이 그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태동하는 부채저항운동의 전 지구적 순환 과정에서 지역 차원의 대안적 화폐-신용 시스템 구축 실험들을 연결하는 협동적 네트워크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한다.

이 책의 결론부에서 투명하게 그려 보이는 ‘사회적 필요와 생산적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신용경제라는 대안모델의 상은 바로 이러한 전망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