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양금(酌古量今)…옛 시와 새로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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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양금(酌古量今)…옛 시와 새로운 시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1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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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83) 치천(穉川)의 시 논평

내 고종사촌 아우 치천 박종산은 시를 논평하는 재주가 매우 정밀한 데다가 혜안(慧眼)까지 갖추고 있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나의 시를 읽었다.

各夢無干共一牀 꿈 제각각 달라 한 침상도 상관없네
人非甫白代非唐 사람은 두보 이백 아니고 시대는 당나라 아니네
吾詩自信如吾面 내 시 내 얼굴과 같다고 자신하니
依樣衣冠笑郭郞 저 흉내 잘 내는 곽랑을 비웃네

치천은 이 시 절구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형의 주장은 비록 그러하지만 형의 전집(全集)을 읽어보면 한 글자도 옛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형이 지금은 옛날과 같고 옛날은 지금과 같다는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자미(杜子美:두보)의 “지금 사람이라고 박대하지 않고 옛사람이라고 좋아하지 않네(不薄今人愛古人)”라는 시론(詩論)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 적이 있다.

“생기가 넘치고 자유로워 얽매이지 않는 것이 시가(詩家)의 요결이요, 문예계의 공안(公案)입니다. 형의 시가 거의 이와 같은 이치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치천의 논평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시에 대해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학(聖學)의 경전에 담긴 뜻에 있어서도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두보의 비웃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재번역)
『청비록 1』

[한정주=고전연구가] 이덕무는 수십 년 동안 시화와 시품과 시평의 방법을 통해 옛 시 또는 다른 사람의 시를 배우고 익히고 의론하고 비평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시풍(詩風)과 시격(詩格)을 개척했다.

이덕무는 이와 같은 시작(詩作)의 방법을 가리켜 ‘작고양금(酌古量今)’, 즉 옛 시를 참작하여 지금의 시를 헤아린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옛 시를 배우고 익히면서 새로운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이덕무는 옛 시와 새로운 시의 모순과 조화 혹은 통섭과 융합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비록 옛 시를 본뜨고 모방하는 것이 삼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각자 자신의 시를 갖고 있는 것만 못하다. 자신의 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천연의 참다움은 많고 인위적인 꾸밈은 적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하나의 조화다. 조화를 어찌 구속하고 얽어매고 본뜨고 모방할 수 있겠는가.

대개 사람은 모두 제각각 한 가지의 시를 갖추고 있다. 더욱이 그 가슴 속에는 가득 시를 품고 있다.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이어서 서로 닮지 않은 이치와 같다. 만약 시가 같아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판각으로 찍어낸 그림이요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의 모범답안과 다르지 않다. 여기에 어찌 기이하고 새로운 것이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옛사람의 체법을 다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옛사람의 체법에 얽매여 스스로 아무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체법이란 스스로 법을 법 삼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갖추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찌 옛사람의 체법을 모두 버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 이덕무의 시 철학은 이렇게 해석하면 쉽다. 옛사람의 시를 배척하지 마라. 오히려 열심히 배우고 익혀라.

옛 시를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옛 시의 체법과 옛 시인의 성령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옛 시에 구속되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고 뛰어나다고 해도 본뜨거나 모방한 시는 오히려 거칠고 조잡한 자신의 시만 못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옛 시를 좇아 억지로 꾸미려고 하거나 인위적으로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냥 자신의 성령을 좇아 표현하는 데 힘쓰면 된다. 옛 시의 체법과 옛 시인의 성령을 엿보면서도 그 체법과 성령에 구속되거나 얽매이거나 본뜨거나 모방하지 않아야 비로소 자신만의 체법과 성령이 담긴 시를 창작할 수 있다.

스스로 옛사람의 체법과 성령을 기준과 규범으로 삼지 않는 가운데 자신만의 체법과 성령이 저절로 갖추어지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옛사람의 시에 담긴 체법과 성령을 배우고 익히면서도 자신만의 체법과 성령을 실험하고 창조하는 것, 바로 그때 비로소 옛 시과 다른 자신만의 시가 탄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시의 체법과 성령을 배우고 익힐 때 스스로 얼마나 오묘하게 풀어내고 투철하게 깨우쳤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득(自得) 곧 스스로 깨달아 터득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깨달아 터득한 것이 없다면 옛 시에 구속되고 얽매이고 본뜨고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덕무의 시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개념인 ‘작고양금’의 궁극적인 경지는 바로 ‘자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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