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⑤
[한정주=역사평론가] ‘소완정(素玩亭)’이라 이름 붙인 서재에다가 책을 가득 쌓아놓은 채 하루 종일 책에 파묻혀 살지만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하는 형국에 처하고 만 제자 이서구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친 박지원의 ‘소완정기(素玩亭記)’ 또한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는 안목’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한 훌륭한 실마리가 된다.
“이낙서(李洛瑞: 이서구)가 책을 쌓아둔 자신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고 이름 붙여 편액을 걸고 내개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닐지만 사람의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지금 자네의 책은 마룻대까지 가득찬 것도 모자라 시렁까지 꽉 채우고 있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둘러보아도 책이 아닌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것이나 마찬가지구만. 아무리 동중서(董仲舒: 한나라의 대학자)의 학문에 몰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화(張華: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의 기억력에 도움 받고 동방삭(한나라의 경술가)의 암송 능력을 빌려온다고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네. 그렇게 되어서야 쓰겠는가?’
그러자 낙서(洛瑞)는 크게 놀라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자네는 물건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바로보고 있자니 뒤를 보지 못하고, 왼쪽을 돌아보자니 오른쪽을 놓치게 되지. 왜 그렇겠는가? 방 한 가운데 앉아 있어서 자신의 몸과 사물이 서로 가리고 자신의 눈과 공간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네. 차라리 자신의 몸을 방 바깥으로 옮겨두고 들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것이 더 낫네. 그렇게 한다면 한쪽 눈만 가지고서도 온 방의 물건들을 모두 살필 수 있네.’
내 말에 낙서(洛瑞)는 감사해하면서 ‘선생님께서는 저를 약(約: 핵심)으로 이끌어 주시는 군요’라고 했다.
‘자네가 이미 약(約: 핵심)의 이치를 알았으니 내가 다시 자네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겠네. 해(日)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지극한 양기(太陽)라고 할 수 있네. 온 세상을 감싸주고 만물을 길러주네. 습한 곳일지라도 해가 비추면 마르고 어두운 곳일지라도 햇빛을 받으면 밝아지네. 그렇지만 태양의 열기가 나무를 태우지도 쇠를 녹이지도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빛이 두루 퍼지고 정기가 분산되기 때문이네. 만약 만 리를 비추는 햇빛을 거두어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가는 빛이 되도록 모은 다음 유리구슬(돋보기)로 받아서 그 정기를 콩알만 하게 만들면 처음에는 불길이 자라나 빛을 발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어나 활활 타오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태양의 빛이 한 곳으로 모아져 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네.’
이 말에 낙서(洛瑞)가 거듭 감사하다고 하면서 “선생님께서 다시 저를 오(悟: 깨달음)로 이끌어주시는 군요”라고 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책들의 정기(精氣)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가까운 공간에서는 자신의 몸과 사물이 서로를 가로막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고 방 가운데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네.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어찌 눈으로 보고 살피는 것뿐이겠는가. 입으로 맛을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고,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수 있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그 정기(핵심)을 얻을 것이네.
지금 자네는 들창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방 안의 사물을 모두 보고, 유리구슬(돋보기)로 햇빛을 모아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유리구슬(돋보기)이 비어 있지 않으면 태양의 정기를 모으기란 불가능하지.
따라서 뜻을 밝히는 이치란 본래 자신을 모두 비우고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네. 또한 담백하고 아무런 사욕이 없어야 하네. 이것이 아마도 소완(素玩)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네.’
내가 말을 끝맺자 낙서(洛瑞)는 “제가 장차 선생님의 말씀을 벽에 붙여두고자 합니다. 그러니 제게 방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글로 써서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마침내 글로 써서 건네주었다. 박지원, 『연암집』, ‘소완정기(素玩亭記)’
박지원과 사우(師友) 관계를 맺었던 이들 중에는 18세기 조선의 실학과 문예를 몇 단계 끌어올린 대학자와 문장가들이 여럿 나왔다. 이덕무(1741년생)·유득공(1749년생)·박제가(1750년생)·이서구(1754년생)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이들은 대부분 서얼출신의 천재들로 박지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익혔는데 유독 이서구만은 명문 사대부가(전주 이씨)의 적자(嫡子) 출신이었다. 그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선조 임금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德興大元君)의 후손으로 왕족이기도 했다.
소완정(素玩亭)의 주인인 이서구가 박지원의 문하에 드나들기 시작한 무렵은 그의 나이 16살 때였다고 한다. 이때 이서구가 박지원을 찾아다니며 학문과 문장을 배우고 익히던 모습을 묘사해놓은 글이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 이서구의 ‘여름밤 벗을 방문한 글’에 화답하다)』에 실려 있다.
“나(박지원)의 옛집이 그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바람에 이서구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를 찾아오곤 했다. 당시 내 집에는 항상 손님들로 웅성거렸고 나 역시 세상사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이 말은 이서구가 어린 시절 눈 오던 날 밤 박지원을 찾아가 술을 따뜻하게 데워 마시고 질화로에 떡을 구워먹던 즐거움을 회상하면서 마흔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 고생으로 백발이 다 되어버린 박지원의 현재 모습에 슬픈 마음이 일어 탄식하며 지은 글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렇듯 각별한 사제(師弟)의 정을 나눈 두 사람이었기에 박지원은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서구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소(素)’라는 한자는 흰 바탕의 편지나 책을 뜻한다. 장서가(藏書家)로도 이름을 떨친 이서구는 서재에 가득 쌓인 책들을 완상(玩賞: 보고 즐김)한다는 뜻에서 ‘소완정(素玩亭)’이라고 했던 듯하다.
그런데 박지원은 온갖 책에 쌓아놓은 채 그것에 파묻혀 지식과 견문을 쌓으면 쌓을수록 도리어 그 지식과 견문에 갇혀 버리고 마는 제자의 독서를 크게 걱정하면서 이서구가 처한 상황이 앞을 보면 뒤를 보지 못하고, 왼쪽을 보면 오른쪽을 놓치게 되는 꼴일 따름이기 때문에 차라리 책에서 얻은 지식과 견문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전혀 다른 각도와 관점에서 다시 그 지식과 견문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자신의 몸을 방 바깥으로 옮기고 들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것에 비유했다.
그렇게 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느라 정작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맹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혜안이 돋보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어찌 눈으로 보고 살피는 것뿐이겠는가. 입으로 맛을 보면 그 맛을 알 수 있고,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수 있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그 정기(핵심)를 얻을 것이네. 뜻을 밝히는 이치란 본래 자신을 모두 비우고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네. 또한 담백하고 아무런 사욕이 없어야 하네.”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까지 통찰하려면 직관(直觀)과 마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세상 만물과 우주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마인드를 지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