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⑦
[한정주=역사평론가] 박지원의 청나라 연행일기인 『열하일기』의 ‘일신수필’ 속에서도 ‘차이와 다양성의 미학’을 응용해 묘사한 한 편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상사(上士: 상류의 선비), 중사(中士: 중류의 선비), 하사(下士: 하류의 선비)’를 논하는 글이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연경에서 돌아온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물어보는 말이 있다. ‘자네, 이번 여행에서 제일 장관이 뭐였는가? 하나만 꼭 집어 말해 주게나.’
그러면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해 버린다.
‘요동 천 리의 넓은 들판이 장관이야’, ‘구요동의 백탑이 장관이더군’, ‘큰 길가의 저자와 점포가 장관이지’, ‘계문(薊門)의 안개 낀 숲이 장관이지’, ‘노구교가 장관이야’, ‘산해관이 장관이지’, ‘각산사(角山寺)가 장관이지’, ‘망해정(望海亭)이 장관이지’, ‘조가패루(祖家牌樓)가 장관이지’, ‘유리창이 장관이야’, ‘통주의 주즙(舟楫)들이 장관이지’, ‘금주위의 목장이 장관이야’, ‘서산의 누대가 장관이지’, ‘사천주당(四天主堂)이 장관이야’, ‘호권(虎圈)이 장관이야’, ‘상방(象房)이 장관이지’, ‘남해자(南海子)가 장관이지’, ‘동악묘가 장관이지’, ‘북진묘가 장관이지’.
대답들이 분분하여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소위 상사(上士)는 정색하고 얼굴빛을 고치며 이렇게 대답한다.
‘허, 도무지 볼 것이고는 없습디다.’
‘호오, 어째서 볼 것이 없던가요?’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장상(將相)과 대신 등 모든 관원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선비와 서민들까지도 모두 머리를 깎았더군요. 공덕이 비록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고 부강함이 진나라와 한나라보다 낫다한들 백성이 생겨난 이래 여지껏 머리를 깎은 천자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드높은 학문을 이루었다 한들 일단 머리를 깎았으면 곧 오랑캐요, 오랑캐는 개돼지나 마찬가집니다. 개돼지에게서 뭐 볼 게 있겠습니까?’
이는 최고의 의리를 아는 자의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질문을 한 사람도 잠잠해지고, 사방에 앉아 있던 사람들 역시 숙연해진다.
그 다음 소위 중사(中士)는 이렇게 말한다.
‘성곽은 만리장성을 본받았고, 궁실은 아방궁을 흉내냈을 뿐입니다. 선비와 서민들은 위나라와 진나라 때처럼 겉만 화려한 기풍을 좇고, 풍속은 수양제와 당 현종 때처럼 사치스러움에 빠져 있더군요. 명나라가 멸망하자 산천은 누린내 나는 고장으로 변했고, 성인들의 업적이 사라지자 언어조차 오랑캐들의 말로 바뀌어 버렸지요. 그러니 무슨 볼 만한 게 있겠습니까? 진실로 10만 대군을 얻어 산해관으로 쳐들어가서 만주족 오랑캐들을 소탕한 뒤라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춘추』를 제대로 읽은 사람의 말이다. 『춘추』 이 한 권은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한 책이다.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긴 지 200년 동안 한결 같이 충성을 다하여 속국으로 일컬어지곤 했으나 실상 명과 조선은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었다.
만력 임진년 왜적의 난에 신종 황제가 명나라의 군사를 일으켜 우리 조선을 구원해 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그리고 터럭 한 올까지 그 은혜를 입지 않은 바가 없었다. 또 병자년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열 황제가 급히 총병 진홍범에게 명하여 각 진영의 수군을 징집해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홍번이 관병의 출항을 아뢰려 할 즈음 산동순무 안계조가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조선이 이미 패배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황제는 계조가 조선에 협력하지 않았다며 조서를 내려 준절하게 질책하였다.
이때 천자는 안으로 복주, 초주, 양주, 당주의 난리를 진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에 타고 물에 빠질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주려는 마음이 형제의 나라보다 더 간절했다. 그러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비운을 당하여 명나라가 망하자 마침내 온 세상 사람들은 머리를 깎고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
변방 귀퉁이에 있는 우리나라만이 이런 수치를 면하긴 했으나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하룬들 잊은 적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대부들 중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려는 『춘추』의 절의를 간직한 이들이 우뚝 서서 100년을 하루같이 그 뜻을 이어왔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중화는 중화일 뿐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중국의 성곽과 궁실과 인민들이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 있고 정덕·이용·후생의 도구도 예전과 다름이 없다. 최·노·왕·사의 씨족도 그대고 있고 주·장·정·주의 학문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하·은·주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당·송·명의 아름다운 법률 제도 역시 변함이 없다.
오랑캐라고 하는 청나라는 중국의 제도에서 이익이 될 만하고 오래 향유할 만한 것들을 가로채 가지고는 마치 본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한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이를 수용하여 본받아야만 한다. 더구나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과 한·당·송·명 등 여러 왕조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한 원칙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셨으나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데 분개하여 중화의 훌륭한 문물제도까지 물리치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정말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화의 전해오는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습속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부터 공업, 상업 등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다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열을 배우면 우리는 백을 배워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한다. 우리 백성들이 몽둥이 만들어 두었다가 저들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두들길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록 하사(下士)지만 감히 말하리라. ‘중국의 제일 장관은 저 기와 조각에 있고, 저 똥덩어리에 있다.’
대체로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에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민가에서 담을 쌓을 때 어깨 높이 위쪽으로는 깨진 기와 조각을 둘씩둘씩 짝을 지어 물결무늬를 만들거나 혹은 네 조각을 모아 쇠사슬 모양을 만들거나 또는 네 조각을 등지게 하여 노나라 엽전 모양처럼 만든다. 그러면 구멍이 찬란하게 뚫리어 안팎이 서로 비추게 된다. 깨진 기와 조각도 알뜰하게 써먹었기 때문에 천하의 무늬를 여기에 다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여 뜰 앞에 벽돌을 깔 형편이 안 되는 집들은 여러 빛깔의 유리 기와 조각과 시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가 꽃·나무·새·짐승 모양을 아로새겨 깔아 놓는다. 비올 때 진창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기와 조각 하나, 자갈 한 조각도 버리지 않고 고루 활용했기 때문에 천하의 고운 빛깔을 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똥오줌은 아주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거름으로 쓸 때는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아까워한다. 한 덩어리도 길바닥에 흘리지 않을뿐더러 말똥을 모으기 위해 삼태기를 받쳐 들고 말 꼬리를 따라 다니기도 한다.
똥을 모아서는 네모반듯하게 쌓거나 혹은 팔각으로 혹은 육각으로 또는 누각 모양으로 쌓아 올린다. 똥덩어리를 처리하는 방식만 보아도 천하의 제도가 이에 다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리라. ‘저 기와 조각이나 똥덩어리야말로 진정 장관이다. 어찌 성지(城地), 궁실, 누대, 점포, 사찰, 목축, 광막한 벌판, 아스라한 안개 숲만 장관이라고 할 것인가.’” 박지원, 『열하일기』, ‘일신수필’ 7월15일(신묘일) (박지원 지음, 리상호 옮김,『열하일기 상』, 보리, 2004. 인용)
여기에서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중화(中華)과 이적(夷狄)의 구분은 전복되고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은 해체된다. 이제 “중화는 중화일 뿐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일 뿐이다.”
또한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오랑캐가 중화가 된다. 그리고 중화는 숭상해야 하고 오랑캐는 배척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오랑캐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마땅히 섬기고 배워야 한다.’ 비로소 중화와 오랑캐는 중심-주변, 지배-종속, 문명-야만의 관계가 아닌-단지 ‘차이’와 ‘다양성’으로 구분될 뿐인-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전환된다.
다만 박지원의 글은 당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직설(直說)’이 ‘역설(逆說)’의 화법을 구사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차이와 다양성의 미학’은 우주 만물 중 가장 존귀한 동물인 용의 ‘여의주’와 가장 미천한 동물인 말똥구리의 ‘말똥’을 동등한 가치로 보는 글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실과 누대가 아닌 깨진 기와 조각과 더러운 똥 덩어리를 장관이라고 말하는 박지원의 화법과 논리 구조와 닮아 있다.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여기 용과 말똥구리의 관계에서 우열(優劣)과 존귀(尊貴)나 시비(是非)의 시각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이제 세상사와 우주만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이’와 ‘다양성’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