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은 꽃을 가리지 않고 호색한은 미인만 고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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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은 꽃을 가리지 않고 호색한은 미인만 고집하지 않는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6.03.1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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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③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③

[한정주=역사평론가] 역대의 문장을 중심과 주변 혹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보지 않고 ‘차이’와 ‘다양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덕무를 비롯한 북학파 그룹의 문장 철학은 탈중심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가치인식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그래서 이덕무는 글을 지을 때는 한 가지 방법이나 한 가지 법칙만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모든 글이 제각기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듯이 글을 지을 때 역시 여러 상황과 경우 혹은 글쓴이의 수준과 자질에 따라 제각각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묘미를 갖출 수 있고 또한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천하의 재주는 초탈한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아한 것과 평이한 것도 있으니 한결 같이 유별나게 신기한 글만 지어내는 것을 강요한다면 혹 그 본연의 천연적 성질을 도리어 잃고 나날이 높고 넓으며 뛰어넘을 듯한 경지로만 치닫게 될까 두려우니, 이는 또한 글의 정도(正道)를 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선비들의 문장을 진작시키는 일이 어찌 한 가지 법칙으로만 되겠습니까. 이는 오히려 글 쓰는 일을 국한시키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글 쓰는 이의 재능에 따라 기이하거나 바르게 하면 저절로 볼만한 것이 있게 되며 힘을 주거나 빼거나 글의 의미를 바로 말하거나 넌지시 풍자하거나 자연스럽게 말하거나 뒤집어 말하는 등 그 변화하는 것은 끝이 없게 됩니다.

다만 그 삶의 본연과 천진을 깎아버리는 일이 없이, 그 진부하고 낡은 잔재들을 버리자는 것뿐입니다. 또한 고인들의 글 쓰는 길을 그대로 따르는 구속을 받아도 안 되고 완전히 버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오묘하게 풀어내고 투철하게 깨우치는 법이 있으니,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마다 각자가 어떻게 잘 터득하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이목구심서’

쉽게 말하자면 때로는 창신(創新)하게 때로는 법고(法古)하게 때로는 동심(童心)으로 때로는 기궤(奇詭)하게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때로는 직설(直說)적으로 때로는 역설(逆說)적으로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평범하게 글을 짓는 것이지 오로지 ‘창신(創新)은 옳고 법고(法古)는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차이와 다양성의 미학’이 전하는 핵심 요지가 바로 어떤 미학이나 철학 혹은 문장론도 중심적이거나 절대적인 진리나 고정불변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덕무의 ‘문장 미학’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그가 나이 24세 때인 1764년(영조 40년) 9월9일부터 11월1일까지 서책을 읽고 사색한 내용을 기록한 ‘관독일기(觀讀日記)’에 비슷한 내용의 문장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이란 구태여 하나의 문호(門戶)에만 집착치 말고 형편에 따라 처리해야 하네. 즉 때로는 너무 곱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괴팍하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신기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평이하게 하기도 하며 혹은 넓게 하기도 하고 혹은 섬세하게 하기도 하고 부화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침착하게 하기도 하되 옛사람의 뜻은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변화 신축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있어야 하네. 만일 옛사람의 뜻을 상실한다면 이는 잡설(雜說)이지 좋은 문장이 아니네’라고 했다.

이어 분국(盆菊)를 가리키면서 ‘저 분국(盆菊)이 혹은 기울어져 있기도 하고 혹은 서있기도 하며 혹은 쳐들어져 있기도 하고 혹은 엎드러져 있기도 하며 황색 꽃과 녹색 잎과 자색 줄기와 백색 뿌리 등 양상이 다양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어디까지나 국화이네. 모든 물건도 다 유추할 수 있네. 비유하건대 자신은 당(唐)을 주장하고 상대방은 송(宋)을 주장하는데 만일 상대방이 자기처럼 당(唐)을 주장하지 않고 송(宋)을 주장한다 하여 상대방을 책망한다면 이 어찌 공론(公論)이라 하겠는가?’고 했더니 증약(曾若)도 그렇다고 했다.” 이덕무,『청장관전서』, ‘관독일기(觀讀日記)’

이덕무가 꿀벌의 예를 들어 “벌이 꿀을 만들 때에는 꽃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 것처럼 홍길주는 여색을 좋아하는 바람둥이의 예를 들어 “호색한(好色漢)은 아름다운 여자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글을 쓰는 일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역설한다.

“문장 역시 기이한 기교로서 요사스럽고 교묘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주 기이하고 아름다운 문장은 간혹 사람을 유혹에 빠뜨려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여색에 빠지는 일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또한 수많은 글의 문체는 모두 제각각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문체를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은 문장의 근본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여색을 좋아하는 바람둥이는 아름다운 여자만 좋아하지 않는다. 촌스럽게 단장한 시골 색시나 들일을 하는 노파 역시 나름의 매력이 있고, 물 긷는 여종이나 주막집 할멈 또한 나름의 정취가 있다.

이 때문에 송옥은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3년을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은 자신보다는 못생긴 아내와 다섯 아들을 낳은 등도자야말로 여자를 가리지 않는 호색한 중의 호색한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일 역시 그렇다. 소품문, 전기문, 세상에서 사용하는 공문서에서 뒷골목의 이야기나 광대들의 우스갯소리까지 모두 나름의 미묘한 구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와 마주치면 예전에 배운 문체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문체를 본받고 싶어진다.

먼저 본 문체만 고집하면서 새로운 문체를 피한다면 문장의 일가를 이루기 힘든 것은 물론 깨달음도 얻지 못할 것이다.” 홍길주,『수여난필(睡餘瀾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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