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⑥차이와 다양성의 미학…모든 글은 나름의 묘미를 갖고 있다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정치·지식 권력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당(漢唐)과 송원(宋元) 등 중국의 고문(古文)만이 문장의 전범(典範)이고 공자나 주자와 같은 성현(聖賢)의 학문, 특히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므로 그외의 문장은 비루(鄙陋)하고 그 밖의 학문은 이단이자 사설(邪說)에 불과하다는 인식체계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중화(中華: 중국)는 고정불변의 중심이자 절대적 가치이고 이적(夷狄: 오랑캐)은 중화의 종속적인 존재거나 하위 개념일 뿐이다. 이는 정치는 물론 문화에 있어서도 같은 이치로 적용된다.
문장에서 보자면 중국의 문장은 중심적·절대적 진리이고 그밖의 문장은 이적(夷狄)의 미개하고 천박한 글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전복하는 문장은 18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만 양반 사대부 사회의 내부에서부터 최초의(?) 도전장을 내민 인물은 아마도 교산 허균인 듯 싶다.
먼저 허균은 “문장에는 제각기 나름대로의 묘미(妙味)가 있다”는 선언을 통해 탈중심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접근 방식으로 고문(古文)의 중심적·절대적 가치와 지위를 약화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구양수와 소식은 송나라의 대문장가다. 구양수의 문장은 그 기백이 힘차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뒤흔들 만큼 부드럽고 간절하다. 일찍이 구양수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소식은 마음먹은 대로 베를 짜듯 문장을 지어서 그 변화가 끝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문장의 기묘함을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또한 천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선진(先秦)과 전한(前漢) 시대의 문장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은 구양수와 소식을 가볍게 여겨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문장은 각자 나름대로의 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궐 주방의 쇠고기와 표범의 태(胎) 그리고 곰 발바닥 요리를 맛보고 난 후 스스로 세상의 진귀한 음식을 모두 먹어 보았다고 여겨 끝내 메기장이나 차기장 혹은 날 생선이나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선진과 전한 시대의 문장을 으뜸으로 여겨 소식의 문장을 가볍게 다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허균, 『성소부부고』, ‘구양수와 소식의 문장에 간략하게 부친다(歐蘇文略跋)’
그러나 허균의 문장론은 당연히 당시 식자(識者)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비방을 샀다. 허균에 대한 비평이 얼마나 잔혹했는가는 그가 죽고 난 후 간행된 실록인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의 편찬자나 사관들의 기록만 보아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글 쓰는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붓을 들면 수 천 마디의 말을 써 내렸다. 그러나 허위로 꾸민 책을 짓는 것을 좋아하여 산수(山水)나 도참설(圖讖說)과 선가(仙家)나 불가(佛家)의 기이한 행적에서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지어냈다. 그 글이 평소 때 지은 것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광해군 6년(1614년) 10월10일).”
하지만 허균은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 대문장가들 일수록 각자 자신의 글을 썼을 뿐 다른 사람의 글을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문장은 옛 문장이기 때문에 좋고 어떤 문장은 옛 문장을 벗어나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그들 각자의 문장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자의 글은 노자의 글로, 장자의 글은 장자의 글로, 맹자의 글은 맹자의 글로, 한비자의 글은 한비자의 글로, 사마천의 글은 사마천의 글로, 반고의 글은 반고의 글로, 한유의 글은 한유의 글로, 구양수의 글은 구양수의 글로 보아야 그 각각의 문장에 담긴 묘미(妙味)를 깨달을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야 비로소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얘기다.